“상해(상하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 사람 없는데 늙으신 분이 그대로 가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만류했으나 백골이라도 고국 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아주 상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죽어도 고국강산’이란 제목으로 1925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
《 전북 완주군의 농촌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막둥이인 내가 태어난 지 1년 뒤인 1951년 돌아가셨다. 홀로 3형제를 키우셨던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하셨다”고 늘 말씀하셨다. 1910년대에 고향 평안남도 성천과 …
“오늘부터 동아일보다.” 어느 날 아버지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집에서 10년 넘게 구독하던 한 일간지를 바꿔본다고 발표하셨다. 내가 고려대에 입학한 1965년 3월의 일이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인창고 2학년 때 뒤늦게 농구를 시작한 나는 장신(192cm) 유망주로 주목받…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한 송해 씨는 63년째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연출자를 300명 이상 겪은 기록도 갖고 있다. 그가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첫 프로그램이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동아방송의 ‘스무고개’다. “양주동 박사 등 명사들을 불러놓고 …
동아일보가 내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쓰고 연출한 연극 ‘시민K’(1989년 초연) ‘가시밭의 한 송이’(1999년 초연), 그리고 최근의 연극 ‘노숙의 시’(2017년 초연)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이 모두 동아일보 기자라는 인연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 작품의…
“내가 동아일보 기자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었다.”(이낙연 국무총리) “내일 아침 동아일보∼. 내일 아침 동아일보∼. 목이 터져라 소릴 질러대며 신문을 팔았다.”(방열 농구협회장) “‘물고문 도중 질식사’ 동아일보 1면의 대문짝만 한 기사로 종철이의 희생은…
‘사람이 아닌 조직에 충성하라’는 말이 있음에도 나는 ‘사람’을 보며 같이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민족 정론지를 표방하는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고 광복 후엔 불합리한 정권에 맞서 왔다. 이렇게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옳은 일’을 …
아버지란 단어는 오랫동안 그리움이란 말과 동의어였다. 50년 전, 서른셋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 어떤 사진 속 모습도 이제는 나보다 근 30년이나 젊은 청년. 그렇게 흐른 세월 내내 아버지에 대해 궁금했다. 그러다 우연히 찾은 작은 노트 속 아버지 일기에서 본 그 젊은 청년의 치열했…
2002년은 내 생애 가장 멋진 일들이 벌어진 해였다. 월드컵 본선에서 단 한 번도 승전보를 울려 본 적이 없던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다. 자칭타칭 축구광인 내게는 꿈만 같은 ‘사건’이었다. 그 4강행을 결정지었던 6월 22일 스페인전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동아일보는 가까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께서 동아일보 창간 독자라는 자부심으로 평생 구독하셨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선천에 사시다가 공산 치하를 피해 6·25전쟁, 1·4후퇴 때 부산까지 내려오신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동아일보를 자연히 접하면서 자…
지금도 대한민국 바둑기사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호칭은 ‘국수(國手)’로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국수’는 ‘그 나라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대회 명칭도 그러했지만 1956년 창설된 동아일보의 ‘국수전(國手戰)’ 우승자가 명실상부한 ‘국수’로 인정받았다. …
1995년 서울의 봄은 러시아보다 더 이르고 따뜻했다. 오랜만에 봄다운 봄을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찾은 고국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볼쇼이발레학교 방학 중 ‘유학의 결실을 맺고 러시아로 돌아가리라’는 결심이 동아무용콩쿠르 참가로 나를 이끌었다. 막상 그렇게 맘을 …
유신은 많은 것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나와 동아일보의 인연도 그랬다. 1971년 법대생이 되었다. 유신시대 개막 한 해 전이다. 동기들은 전북 진안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올라온 나에게 ‘진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진안 촌놈, 진짜 촌놈의 줄임말이다. 농이 많이 섞인 별칭이었지만 …
1991년 3월 17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을 출발해 경기 성남을 돌아오는 제62회 동아마라톤에 출전했다. 5000m와 1만 m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나는 42.195km 풀코스를 완주할 훈련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당시 소속팀(코오롱) 이창우 선배 옆에서 페이스메이커로 도와주며 2…
1978년 10월 당시 제8회 동아음악콩쿠르 본선 및 대상 선발 연주회를 앞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잘 먹어야 된다며 집에서 자주 고기를 구워 주셨다. “노래를 부드럽게 부르려면 목도 부드러워져야 한다”며 내게 비계가 많이 붙은 고기를 줬다. 아무 과학적 근거도 없었지만 어머님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