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어느 날, 서울 용산의 본사 사옥에서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주재의 긴급회의가 열린다. 신규 사업에 관한 논의였다. “차 사업을 하고 싶소. 녹차 사업이오. 당장 돈이 벌리는 사업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잘 알아요. 당분간 돈과는 상관없겠지만 성공한다면 태평양은 모든 …
‘우보천리’라는 말이 있다. 소걸음으로 천리 길을 간다는 뜻이기도 하고, 천리 먼 길을 가려면 소걸음처럼 긴 호흡으로 걸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지의 나라 중국 시장을 개척하던 시절, 서성환 당시 태평양 회장이 그랬다. 1976년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중국 내 이념 대결이 사…
1970년대 말부터 국내외 여러 기업들이 사업 다각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국내 화장품 시장의 70%를 점하고 있던 태평양 역시 신사업에 뛰어들지 않고는 성장이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1980년대 분위기에 따라 태평양도 금융, 서비스 등 3차산업에 비중을 두고 다각화를 추진했다.…
1960년대 화장품업계의 전근대적인 유통 구조는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에게도 큰 고민이었다. 해결책을 찾던 그는 지정판매소 제도를 도입한 ‘태평양화장품판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화장품 제조회사가 만든 최초의 판매회사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약국이나 양품점, 일반 소매상 등을…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는 ‘연구실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코티분 같은 스타 화장품을 만들어 내고 나서도 끊임없이 연구원들을 만나 독려하고 함께 머리를 맞댔다. 1964년 어느 날 그는 연구원들에게 인삼 화장품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는 개성…
제22153호 대한민국 여권. 희끗하게 빛바랜 오래된 여권 속에 서른여섯, 침착함이 돋보이는 청년의 사진이 들어 있다.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가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3개국 여행을 떠난 1960년 7월은 6·25전쟁이 끝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그동안 연구소에 투자를 늘리…
휴전 1년 후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는 서울로 돌아와 용산구 후암동에 둥지를 틀었다. 외국 군대에 내준 용산 땅을 보며 그는 이 땅에 사업의 주춧돌을 놓겠다고 다짐했다. 후암동 사업이 번창하면서 살림하는 아내의 일상도 고돼졌다. 여공들과 똑같이 제품을 만들고 매끼 식사까지 도…
가업은 전과 다름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다. 중국에서 보았던 넓은 시장의 잔상이 청년 서성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는 베이징에서의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가족의 동의를 얻어 상호를 ‘태평양상회’로 바꾼다. 생명의 근원이자 한없이 넓고 깊은…
장원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의 나이가 열여덟 되던 해인 1941년 개성 최초의 3층 양옥 건물 ‘김재현 백화점’이 문을 연다. 선망의 대상인 고급 제품이 가득하던 그곳에서 도매상들을 통해 ‘창성당 제품’도 판매되기 시작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백화점 판매가 된다는 건 품질로 승부할…
《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 고 장원 서성환(粧源 徐成煥) 회장(1924∼2003)은 국내 화장품 산업의 선구자다. 불모지였던 국내 화장품 산업에서 아모레퍼시픽을 의(義), 신(信), 실(實)로 꼽히는 개성상인의 삼도훈(三道訓)으로 이끌어 글로벌 기업의 초석을 놓았다. 올해로 창업 70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