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를 경제적 관점에서 조망해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대표가 전쟁을 불러온 경제 현상과 전쟁으로 바뀌는 경제를 색다른 시각으로 분석합니다.
기사 11
구독 15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이스라엘은 각각 남과 북에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의 선제 협공을 받았다. 그날은 이스라엘이 가장 전쟁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유대교의 가장 큰 성일인 욤 키푸르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이날 유대인은 하루 종일 음식은 물론이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
《1914년 8월 4일 오후 11시, 12시간 안에 벨기에에서 물러나라고 독일에 보낸 최후통첩 시한이 지나면서 영국은 공식적으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개전은 아니었다. 영국은 이미 1907년부터 전쟁 장관 리처드 홀데인의 주도 아래 독일과 전쟁을 하면 프랑스에 보낼…
《1943년 12월 2일 오후 7시 반, 폭격기 편대가 바리 상공을 뒤덮었다. 볼프람 폰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독일 2항공군 소속의 융커88 105대였다. 볼프람은 제1차 세계대전 때 80대를 격추한 독일 공군 에이스, 일명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친척 동생이었다. 만프…
《1860년 윌리엄 워커는 온두라스의 트루히요에 도착했다. 워커의 최종 목적지는 트루히요에서 북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섬인 로아탄이었다. 로아탄에 도착하면 워커는 그곳의 소수 영국인들과 함께 무력으로 자신의 국가를 선포할 계획이었다. 말하자면 워커는 필리버스터였다. 필리버스터는 …
《“우리가 해외에서 제조된 제품을 사면 우리는 제품을 가지고 외국인이 돈을 가집니다. 우리가 국내에서 제조된 제품을 사면 우리는 제품과 돈을 둘 다 가지지요.” 보호 무역을 옹호하는 위 말을 한 사람은 누굴까? 세계화를 거스르는 그 뜻을 보건대 과거의 누군가라고 짐작하기 십상이다. 실…
《올해 5월 14일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내난민감시센터는 작년 말 기준 전 세계 국내 난민 수가 7590만 명이라고 밝혔다. 2022년 말의 7110만 명에서 약 7% 늘어난 이 숫자는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8년 이래로 최다였다. 국내 난민이란 전쟁이나 내란 혹은 재해…
《영국 해사무역기구는 6월 13일 목재를 운송 중이던 팔라우 선적의 우크라이나 화물선 버베나가 예멘 후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5월 17일에는 후티의 대변인 야흐야 사리가 미군의 무인기 MQ-9 프레데터 1대를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2014년 이래 …
《5월 9일 시리아 국방부는 이스라엘군이 골란고원에서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을 향해 발사한 미사일을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시리아의 남서부와 이스라엘의 북동부가 서로 접하는 곳에 위치한 골란고원은 국제법상 시리아 영토지만 1967년 3차 중동전 이래 약 3분의 2의 넓이가 이스라엘…
《5월 3일 중국의 군용기 14대가 대만 본섬의 76km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대만 국방부는 발표했다. 그 이전인 3월 22일에는 중국 국방부가 “미국이 불장난을 하고 있다”며 강하게 경고했다. 미 육군의 2급 특수부대인 일명 그린베레가 진먼다오와 펑후 제도, 즉 대만 해협의 금문도와 …
《19일 이스라엘은 이란을 공습했다. 이란의 13일 이스라엘 공습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습한 이유는 이달 1일 시리아 주재 자국 영사관이 미사일로 공격받아 16명이 숨졌기 때문이었다. 영사관과 같은 외교 공관은 ‘외교 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의해 자국 영토의 일부로…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이제 2년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물론 러시아는 이를 전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용어로는 그저 ‘특수군사 작전’일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소련은 자신의 폴란드 침공을 가리켜 ‘붉은 군대의 해방 운동’이라고 불렀다. 부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