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절망은 2007년 봄 집 앞 문구점에서 시작됐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김정우(가명·14) 군은 문구점용 간이 오락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오락기 화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게임 빨리 끝내.” 같은 학교 동급생 4명이 뒤에서 정…
국내 대중음악 산업은 언젠가부터 ‘국가(國家)’를 닮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아이돌 음악이 전성기를 맞으며 굳어지게 된 경향이다. 강한 카리스마의 가요기획사 대표를 중심으로 가수들을 발굴, 육성하고 데뷔 후 인기를 얻는 방식이 그렇다. 대형 음반사와 그 산하 레이블, 독립 음반…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하루였다. 집안 청소하랴 요리하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리토 이쿠코(織戶郁子·58·여) 씨는 잠시 쉴 요량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TV를 틀었다. 7월의 긴 해는 서쪽으로 붉게 넘어가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시가 현 오쓰 시…
그해 여름엔 모두가 미쳐 있었다. 온통 축구 얘기뿐이었다. 모든 일과는 ‘축구 시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예선, 16강, 8강, 4강전까지. 경기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더 깊은 집단적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수백만 명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월드…
《 공장도, 판매부서도 없는 회사에는 종종 이런 전화가 걸려온다. “중동 지역에 일하러 왔습니다. 강풍이 불어도 뒤집히지 않는 건 이 우산밖에 없네요. 하나 더 보내주실 수 있나요?” “산 지 몇십 년 만에 양산 살이 부러졌는데 계속 쓰고 싶어요. 고칠 수 없을까요?” 전화를 응대하는…
일몰을 뜻하는 ‘선셋(sunset)’이 문제였다. 7월 초. 50대 남자 둘이 70대 이장 할아버지들에게 불려가 어린애처럼 혼이 났다. “어떤 놈이 기획했는지 모르겄지만, 안 그래도 지는 해 신세인 마을에 ‘아예 망해버리라’고 불 지르는 거 아녀?” 두 남자는 머리만 조아렸다. “하…
《 어머니, 2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앞으로 6시간만 지나면 어머니를 뵙게 되는데도 이 마음을 글로 남기고 싶어 펜을 듭니다. 목소리는 어떨지, 키는 얼마나 클지, 생김새는 사진과 어떻게 다를지 모두 궁금하네요. 어머니도 같은 마음이실 거란 생각을 합니다.…
이맘때 제주는 성게가 제철이다. 사방에서 바람이 흐드러진 오후면 어촌 마을 탈의장 밖은 성게 다듬는 해녀들의 손길로 소리 없이 분주해진다. 한림읍 바닷가에 자리 잡은 귀덕2리도 마찬가지다. 나지막한 현무암 돌담길 너머, 집집마다 널어둔 잠수복이 바람에 한가롭게 흔들린다. 오전 내내 물…
그가 펜을 꺼냈다. 수화를 할 줄 모르는 기자와의 대화는 이렇게 종이와 펜으로 이뤄졌다. 또박또박 하얀 종이 위에 펜이 움직인다. 두 차례에 걸쳐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때로는 격정에 찬 듯 빠르게, 때로는 감회에 젖은 양 부드럽게, 힘이 실린 큼직한 글로 조금씩 종이 …
《 #1.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보는 것이다.(생텍쥐페리) “이 사람, 보는 순간 너무 예뻤어요. 애인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죠.”(김동열 감독·52) “이 남자, 젊었을 때 잘생겨 인기가 많았죠. 지금은 좀… 아닌가?”(홍성령 코치·49) 남자와 여자가…
《엄마는 감옥에서 더 평온해 보였다. 연녹색 수의(囚衣)를 입고 오늘도 ‘괜찮다’는 말만 계속했다.“밥은 먹을 만해?” “그럼, 잘 먹지.” 김경숙(가명·64) 씨가 하얗게 센 머리를 긁적였다.손등의 검버섯이 더 짙어져 있었다. 수감된 지 이제 9개월. 면회 때마다 반복되는 엄마의 ‘…
《 “한국 최초의 정통 스포츠카를 소개합니다!” 1996년 7월 1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리츠칼튼호텔의 신차발표회장에서 날렵한 빨간색 스포츠카가 눈부신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차는 어떻게 개발했습니까?” “몇 대나 팔 건가요?” 행사장에 몰린 400여 명의 취재진과 외부…
트럭에 짐을 싣는 상차(上車) 작업은 오전 6시쯤 시작했다. 일을 마치는 데는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지난달 24일 경기 분당의 물류센터 주차장에 도착한 김종성 씨(38)는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택배기사의 긴 하루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오른쪽 귀에 블루투스용 헤드폰을 꽂은…
“사고뭉치가 착한 아빠 됐어요”■ 2기 졸업생 박현석 씨가 선생님께선생님, 저 아빠 됐습니다. 23일에 병원 가면 딸인지 아들인지 알려준대요. 솔직히 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시잖아요, 아버지가 저 때문에 얼마나 많이 학교에 가셨는지. 저랑 똑같은 놈 나오면 머리 아플 것 같아요. 아…
《 “네가 어떻게 대회를 만들어.” 먹구름으로 하늘을 온통 시커멓게 칠해놓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왜 안 된다고만 할까, 시도해 보지도 않고…. 제주의 산과 들을 마음껏 달리며 우정을 나누는 ‘트레일 러닝(trail running) 대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뜯어말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