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똑같은 꿈이다. 대여섯 살 된 아들을 등에 업고 있다. 아이가 제법 무거워 포대기를 자꾸 추스른다. 눈을 뜬 아이가 “엄마, 왜 자꾸 깨워”라며 투정을 부린다. 다시 업어주니 아이는 쌔근쌔근 잠이 든다. 아이 얼굴에 손을 뻗어 본다. 보드라운 살결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
400여 년 전 당대의 유명 문인이 퇴계 이황(1501∼1570)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이다. 현대 사학계도 이 글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다. 퇴계의 명성은 이 글이 쓰였던 1600년 초에도 문묘종사(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위패를 함…
《 “사람 앞날은 원래 모르는 거다.” 무속인 정태자 씨(61·여)는 앞에 놓인 맥주잔에 소주 1병을 넘칠 듯 따르며 입을 열었다. 마주 앉은 식탁에 놓인 불판엔 그을려 바싹 마른 삼겹살과 김치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오후 4시, 소주를 마시기엔 이른 시간. 하지만 그는 점집 …
《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두만강 물속으로 혁이(19·2005년 탈북 당시 12세)는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해가 떨어진 뒤로 내내 비가 내린 탓에 강물 위로 안개까지 뿌옇게 끼어 있었다. 5월 봄 날씨라지만 북한과 중국을 가르는 강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두 다리를 모두 물…
《 “큰아들이 몇 학년이지? 그래, 공부는 잘하고?” 살면서 셀 수 없이 들어온 질문. 그때마다 손은수 씨(46)는 애써 못 들은 체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면 안 된다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랬다. 평소 소주 반병이던 주량은 두 병을 훌쩍 넘겼다. 가슴속에 웅크리고 …
《 새벽 가을바람은 거셌다. 옷깃을 세워 바람을 막았다. 내 나이 열여덟 살 때 무작정 인력시장에 나섰다. 아저씨들과 함께 간 곳은 이름 모를 공사장. 처음으로 야구공 대신 삽자루를 잡았다. 좋은 글러브가 갖고 싶었다. 고교 1학년 때 없는 살림에도 큰맘 먹고 어머니가 36만 원짜리 …
《 앞치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를 꺼낸다. 앞면은 돼지고기 가격표. 종이를 뒤집자 시(詩)밭이 펼쳐진다. 할 일도 많은 돼지갈비집 저녁 아홉시/뒷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구이화덕을 닦는데/ 일곱 살 주인집 손녀딸/쉰일곱 궁뎅이 밑에/앉을깨를 넣어준다/ 하늘에 떠가는 빛 바라며/별 비행…
《 아토피 증상과 스테로이드제(劑) 부작용으로 6년간 집에서 누워만 지내던 청년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억대 연봉의 영어학원장으로 변신한다. 14년간 출판사로부터 외면받았던 무명작가가 총 200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생을 바꾼다. 공고 출신 젊은이가 영어학원 강사로 변신…
《 수요집회 참가자들이 팔을 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칠 때 김복동 할머니(87)는 야윈 팔을 겨우 들어 허공에 대고 한 번 힘없이 저었다. “피해를 보상하고 공식 사과하라”는 20년간의 외침과 이에 귀를 닫은 일본 정부에 지친 김 할머니는 언제부턴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이따금 …
《또 손님이 밀려든다.터치스크린을 두드리느라 손가락이 아프다.강원 춘천시 중앙로에서 복권가판점을 운영하는 김모 씨(59·여)의 하루는 늘 고단하다.가로 1.8m, 세로 1.5m, 높이 1.9m의 공간에 갇혀 매일 똑같은 일을 한다.돈을 받고 복권을 내준다.아니, 행운을 판다고 해야 하…
한 장의 사진은 때로 수많은 사연이 엮인 ‘이야기 타래’가 된다. 시공간을 가르며 제각각 약동하던 이야기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딱 한순간의 화면으로 고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선임연구원(44)이 지난해 우연히 본 100여 년 전의 한 대가족 사진이 바로 그랬다. 마당에 두…
《 화장품 회사 영업사원 그만두고 룸살롱 과일 납품 사업 시작. 보기 좋게 실패. 이번엔 신혼집 팔아 4평짜리 미니슈퍼 열었지만 또 실패. “인생에 미래가 안 보여.” 네 살, 한 살짜리 두 아들을 남기고 아내가 떠났다. 밤새워 김밥 말아 대학 매점에 납품해봤지만 역시 실패. 은행대출…
[1막] 첫 가족여행을 떠나다 배우 염동헌 씨(43)는 한참을 세어 보았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 통장 잔액 표시란에 숫자 ‘0’이 줄줄이 찍혀 있는 게 이상했다. 카드 빚도 갚고 강원 속초에 계신 부모님께 오랜만에 목돈도 보내 드렸다. 그러고도 이렇게 돈이 남아 있다니, 내 통장 …
“딱딱딱딱딱….” 금속성 막대로 시멘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다. 이내 조용한 학교 건물을 가득 채운다. 봄기운이 수줍게 느껴지는 지난해 2월 말의 어느 날. 아이들이 없는 빈 건물 곳곳을 김헌용 씨(25)가 걷고 있었다. 헌용 씨가 1급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은 그의 손에 들…
“딱딱딱딱딱….” 금속성 막대로 시멘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다. 이내 조용한 학교 건물을 가득 채운다. 봄기운이 수줍게 느껴지는 지난해 2월 말의 어느 날. 아이들이 없는 빈 건물 곳곳을 김헌용 씨(25)가 걷고 있었다. 헌용 씨가 1급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은 그의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