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리에 밤톨 크기의 화상을 입은 뒤부터 더이상 머리카락이 나지 않았다. 모발 사이로 허옇게 드러난 두피를 본 사람들은 “머리가 왜 그렇냐”고 물었다. 탈북여성 이수미(가명·31) 씨는 매번 “탈모가 있다”고 둘러댔다. 잊고 싶은 과거는 입밖에 꺼내기도 싫었다. 악몽 같던 화상의 …
“우리는 일어서려 합니다. 슬픔과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27일 오전 11시 인천 남동구 인천시청 앞 미래광장. 또박또박 추도사를 읽던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가족대책위 정명교 부위원장(33)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눈앞에는 정홍원 국무총리, 정종…
어머니는 형편이 나아지면 꼭 데리러 오겠다며 네 살배기 셋째 딸을 친척집에 맡겼다. 어머니 기억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이정미 씨(44·여)는 친척 손에 이끌려 이집 저집을 돌다 전남 구례군의 한 노부부 집에 입양됐다. 호적상 이름도 윤정미로 바꿨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 두 언니…
“머리가 하얘지셨네요. 건강히 잘 계셨어요?” 5일 오후 4시경 서울 도봉경찰서 도봉1파출소. 군복무 중인 성모 씨(19)가 어머니와 함께 박종규 경위(55)를 찾아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손에는 귤 한 박스를 들고 있었다. 앳된 소년이었던 성 씨는 어느새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 있…
“아이가 남겨 놓은 글을 통해 아빠에 대한 증오를 발견하고 제가 죄인인 걸 알았습니다.” 2011년 모친을 살해하고 8개월간 시신을 방치한 지모 씨(21·범행 당시 18세)의 부친(55)은 2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아동학대 없는 세상을 위한 기자간담회’에 나와 이…
‘그때 집 밖으로 뛰어나가는 언니를 돌려세워 우산을 건넸더라면…. 언니는 한강을 건너 무학여고로 가는 한성운수 16번 버스를 놓쳤을 테고 그날 그 시간에 성수대교 위에 있지 않았을 텐데.’ 꼭 20년 전인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로 큰딸 황선정 양(당시 16세·무학…
‘용남이 떠나고 은향이 너도 떠난다/정든 고향 두고서 어데로 떠나가느냐/자유와 인생에 등불의 빛을 따라서/눈물 없는 나라를 찾아서 고향을 떠난다…’ 탈북했다가 딸이 보고 싶어 북한에 돌아간 고경희 씨(39·여)의 친오빠 고경호 씨(45)가 본보에 이런 자작시를 보내왔다. 경희 씨는…
2012년 1월, 백두산의 칼바람은 박동순(가명·19) 양의 옷 안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여름이면 백두산에 만발한 푸른 들쭉을 팔아 용돈을 버는 북한 양강도 태생 박 양에게 백두산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털신만으로는 백두산의 겨울이 가져온 동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박 양…
2001년 3월 18일 오후 8시 20분 광주 광산경찰서 삼도파출소 앞 검문소. 신종환 경장(당시 38세·사진) 등 경찰관 3명은 도난 차량을 발견…
“죽은 뒤에 저 장례식장 앞을 가득 채운 화환들은 뭡니까? 그 돈으로 폐쇄회로(CC)TV 하나만 달아 놨더라도 이런 극한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4일 낮 12시 반경 화장장인 세종시 연기면 은하수공원. 2일 포로체험 훈련 도중 숨진 제13공수특전여단 고 이유성 중사…
“처음엔 이사를 가려고 했어요. 집에 체리의 흔적이 곳곳에 있고 자꾸 생각이 나니까….” 지난달 17일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로 숨진 고(故) 윤체리 양의 아버지 윤철웅 씨(49)는 딸 이야기가 나오자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윤 씨는 딸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
“이거 예쁘네요. 잘 포장해 주세요.” 이창근 씨는 문구점에 진열된 마론 인형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금발에 날씬한 몸매, 커다란 눈에 화려한 원피스 차림. 2007년 성탄절을 보름 앞두고 이 씨는 리본으로 포장된 마론 인형 선물상자를 들고 동네 문구점을 나섰다. 딸 혜진이(…
박모 씨(61·여)는 8년 전부터 큰딸(36), 작은딸(33)과 서울 송파구 석촌동 반지하 주택에서 살았다. 이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작은 방 2개, 화장실과 부엌으로 이뤄진 10평 남짓한 공간에 살면서 구형 폴더 휴대전화 1대를 함께 사용할 정도였다. 박 씨는 12년 전 남편이 방…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김병연 씨(53)에게는 그래도 한 가지 낙이 있었다. 아내와 딸이 잠든 시간. 김 씨는 아들을 집 근처 단골 부대찌개 식당으로 불러내곤 했다. 김 씨가 소주를 잔에 따르면 아들 정훈 씨(20)가 국자로 앞 접시에 찌개를 나눠 떴다. 부자(父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