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회담에 응한 지 6일 만에 북-미 회담이 재개됐다. 미국과의 회담을 위해 뉴욕에 간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기자들에게 “지금은 모든 나라가 화해를 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북한이 대결과 도발을
해병부대 총기 사건은 지난달 말 정년퇴직한 선배가 남긴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는 논설위원 동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 “군과 검경(檢警)은 비판을 할 때도 밑바탕에 애정을 깔고 바라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군과 검경은 나라의 근간을 지키는 조직이기
요즘처럼 국회의원들이 ‘북한 인권’을 자주 입에 올린 적은 없다. 한나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 7명 가운데 3명은 동아일보 설문조사에서 “6월 국회에서 북한인권법안을 한나라당 단독으로라도 통과시켜야 한다”고 답변했다. 북한 인권에 대한 논의 자체를 거부하던
지난 주말에 찾아간 백령도는 아직 봄 세상이었다. 육지의 아카시아는 이미 꽃을 피웠지만 백령도 아카시아는 막 여린 연초록 잎을 내밀기 시작했다. 기온도 육지보다 낮아 맑은 날씨에도 해풍이 쾌적했다. 1년 전 천안함 폭침사건만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 8번째로 큰 섬
“세습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북한의 사정이기 때문에 뭐라고 언급할 수가 없고 또 잘 알지 못한다.”(2010년 9월 러시아24 TV) “권력 승계는 일반적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3대를 세습한다고 해서 곧바로 북한이 위험해진다고 생각하지
11일 서울 한남동 외교통상부 장관 공관에서 조촐하지만 의미가 큰 만찬행사가 열렸다. 김성환 장관의 초청으로 외규장각 의궤 반환을 위해 활동해온 ‘외규장각 포럼’ 위원들이 모였다. 학계와 문화계 전문가, 언론인, 공무원들이 어울려 사흘 뒤로 다가온 외규장각 의궤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은 두 달 전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서 열린 북한 인권 개선 관련 공청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뛰고 있는 대표적인 국회의원이다. 황 의원의 이름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
“깨끗하게 단념하시오(cut and cut cleanly).” 1986년 2월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몰락을 상징하는 유명한 발언이다. 마르코스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마닐라를 방문했던 폴 렉설트 미 상원의원에게 새벽2시에 전화를 걸었다. 지푸라기라도
북한의 집요한 대화공세가 먹혀 결국 남북 당국이 만나게 됐다. 우리 정부가 역(逆)제의를 하며 받아치기도 했지만 북한이 신년공동사설에서 제시한 ‘대화와 협력 분위기’로 상황이 급변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을 저지른 북한은 어느새 긴장완화를 주도하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가 되면 베이징 시내 중국 외교부 남쪽 청사 2층 기자회견장에 1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든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같은 큰 사건이 터졌을 때는 참석자가 200명을 넘어선다. 언제나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 외국특파원들이 절반
김정일 김정은 부자는 25일 밤 샴페인을 터뜨렸을 것 같다. 연평도를 향해 170발의 포탄을 쏜 뒤 이틀 만에 눈엣가시 같던 남한 국방장관이 날아갔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천안함 공격 때는 남한의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경질됐다. 김정일 부자는 의기양양해 다음번에 제거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26일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를 학생들의 필독서라고 치켜세웠다. 수용소 군도는 옛소련 스탈린 시대 악명 높던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운영하던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한 작품이다. 197
7월과 8월 운산 함흥 신의주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 관영언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많은 주민들이 구조됐다며 충성 경쟁을 벌였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달 21일 압록강이 범람해 신의주시 일대가 침수됐지만 김 위원장의 명령에 따
뜻밖의 손님이 그제 필자를 찾아왔다. 한국에 정착한 지 4년 된 탈북자 김인화(24) 인경 씨(22) 자매와 친구 박순희 씨(24)였다. 박 씨는 두 살짜리 딸을 안고 왔다. 그들이 발걸음을 한 계기는 6년 전 필자가 쓴 ‘6월의 혼란’이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당시 필자는 남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