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난 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을 생각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떠올렸다. 조선시대의 실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생활 중 ‘목민심서’ 등 불후의 명저를 저술한 다산초당도 중요하지만,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 또한 그 의미가…
나뭇잎들이 떨어진 창밖에 유난히 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 나무는 지난봄 온몸의 가지를 절단당한 나무다.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집 안을 어둡게 한다고 아파트 저층 주민들이 항의한 탓이다. 그래서 봄에 가지치기할 때 가지만 자른 게 아니라 아예 윗동을 싹둑 잘라버렸다. 마치 커다란 …
전남 완도에서 찐빵을 사먹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밤거리를 걸어가는데 멀리 ‘찐빵’이라는 간판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릴 때부터 찐빵을 좋아해온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선뜻 찐빵집으로 들어갔다. 내 주먹보다 큰 완도의 찐빵은 투박하지만 …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 중에서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티베트의 한 승려가 황, 백, 적, 흑, 청 등 색채의 모래로 만다라를 그리는 장면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 그린 만다라를 손으로 지워버리는 장면이다. 만다라는 불법의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경…
태풍이 몰아치는 거리를 걸었다. 상반신을 잔뜩 구부린 채 태풍 속을 걸으며 간간이 거리의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나무들은 온몸을 뒤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한쪽으로 계속 기울어지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태풍을 견뎌내는 자세가 의연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수백 년…
한 남자가 물동이 두 개를 물지게에 지고 물을 날랐다. 오른쪽 물동이는 집에 도착해도 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왼쪽 물동이는 금이 가 물이 새는 바람에 물이 반도 차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는 늘 물이 새는 물동이로 물을 날랐다.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어른이 하루는 남자에게 점잖게…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문득 나와 내 인생을 객관화해 각자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사랑하던 남녀가 다정히 손을 잡고 가다가 잠시 손을 놓고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나’ 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서로를 응시…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일등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누구나 다 일등이 될 수는 없으므로 삼등이나 그 이하가 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도대체 일등과 일류, 삼등과 삼류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또 ‘등(等)’과 ‘류(流)’에는 어…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할 때였다. 복학 신청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아들은 등록금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등록금 내야 한다는 말을 안 하니?” 내가 궁금해서 묻자 아들은 복학 신청을 했는데도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등록금 고지 내용이 뜨지 않는다…
거리에 마른 나뭇가지가 많이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띈다. 꽃샘바람이 유난히 기승을 부린 탓인지 올봄엔 나뭇가지가 더 많이 떨어져 거리에 나뒹군다. 대부분 작고 가는 것들로 길고 굵은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는 경우는 퍽 드물다. 예년엔 그렇지 않았는데 올봄엔 그런 나뭇가지를 유심히 살펴보…
서울 영등포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주머니한테 꽃대가 막 올라온 작은 수선화 화분을 한 개 샀다. 비닐봉지에 넣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올봄에는 내 손으로 수선화를 피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동안 사는 데 너무 바빠 내 손으로 꽃 한 송이 키워 본 게 …
내 책상 앞에는 토성에서 찍은 지구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다. 그 사진은 신문 1면에 머리기사로 난 토성 사진으로, 말하자면 ‘토성에서 본 지구’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은 지구를 찍은 사진이 아니라 토성을 찍은 사진인데, 일곱 개 토성의 고리 너머 머나먼 곳에 지구가 조그마하게 …
새해 달력을 넘긴다. 일요일 외에도 붉은 숫자로 인쇄된 국경일들이 눈에 띈다. 국경일이 아니더라도 날짜 밑에 각종 기념일 명칭을 인쇄해놓았다. 우리 사회가 기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들을 미리 고지해놓은 것이다. 이런 기념일은 국가나 사회의 삶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개인의 삶에도 존…
종은 외로운 존재다. 종각에 외롭게 매달려 누군가가 자기를 힘껏 때려주기만을 기다린다. 누가 강하게 때려주어야만 종은 제 존재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종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온몸에 아무리 상처가 깊어가도 누가 종메로 힘껏 때려주기만을 기다린다. 만일 때려주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
다시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기온이 뚝 떨어져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종종걸음을 치다가도 첫눈을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첫눈은 내가 기다리기 때문에 온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 때문에 온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얼마나 첫눈을 기다리며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