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묵상집 하나를 쓰고 싶다.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다. 그동안 많은 책을 냈다. 책이라면 진력이 날 만도 하다. 그 책들도 엄밀히 말하면 내 묵상을 통해 쓴 글들이니 묵상집이라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썼던 시집이나 산문집들과는 전혀 다른 내 …
고전은 저자의 오랜 노력의 산물이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1596년에 시작해 1610년까지 15년 걸려 완성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20세에 계획해 63년이나 걸려 그가 죽은 1832년 완성했다. 토인비는 23개 문명의 흥망성쇠를 다룬 ‘역사의 연구’를 1934년에 시작해 27년…
“시한부 얘기를 해보자. 하지만 절망 대신 희망과 행복을 얘기하자.” 드라마 ‘여인의 향기’는 이 두 문장으로 출발했다. 처음엔 나쁜 검사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개과천선하는 이야기, ‘88만 원 세대’가 불치병에 걸려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등을 놓고 고민했다. 주인공이 나쁜 검사라면,…
중년의 문턱을 넘어서고 나면 세월은 속절없이 흐른다. 흐르는 강물과 같은 세월은 이것저것 다 할 수 없으며,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유한함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에게 버킷리스트는 꼭 하고 싶은 일로 채워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포함한다. 첫째, 우선은 미혹…
나는 버킷리스트를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것들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죽기 전에’는 구체적인 계획과, 현재의 나의 삶과의 연속성이 결여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한다면 ‘죽기 전’까지 기다리지 말고 현재의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켜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이…
나는 작년 가을부터 500원짜리 동전을 모으고 있다.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의 돼지저금통에는 동전이 제법 그득하다. 그 동전에 새겨진 학을 내년 12월까지 1000마리를 목표로 사냥하고 있는 것이다. 밤마다 내 돼지저금통 속에는 희망찬 학의 하얀 날갯짓이 가득 찬다. 내가 하던 사업…
며칠간 먼 나라에 다녀왔더니 그동안 여독이 많이 쌓여서인가 계속 잠이 쏟아진다. ‘잠자는 이들과 죽은 이들이 어쩌면 그렇게 서로 같은지! 죽음은 그 날짜가 알려지지 않았도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한 구절도 떠올리면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긴 잠을 자는 것이 곧 죽음임을 생각한다. 그…
나는 1975년부터 10년 가까이 독일에 머물렀다. 지금은 달라져서 등록금을 받는 주(州)도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학교는 국립이어서 등록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9년 넘게 고등교육을 독일에서 공짜로 받았다. 학비가 무료인 이유는 교육만큼은 돈을 받고 시켜서는 안…
생은 느긋하지 않으나 여생이란 느긋해야 할 터. 나는 아직껏 느긋할 줄 모른다. 처서(處暑) 뒤이므로 아침저녁 옷깃 언저리가 서늘하다. 한낮의 빨래들도 따가운 햇살을 받아 아이들처럼 좋아라 하며 건들바람 한 자락에도 앞장서서 펄럭인다. 올여름은 폭우의 여름이었다. 이런 폭우의 연속…
연애를 하면서도 언제든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무학에, 별 볼 일 없는 감독인 내가 젊음이 넘치고 인기 있는 여배우(16세 연하의 배우 채령 씨)와 결혼한다는 건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8년간의 연애 끝에 어느 날 집사람이 “결혼하자”며 광주의 처갓집에 데려갔다. …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블랙 유머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 고흐가 죽기 얼마 전에 비극적인 무드로 그린 ‘밀밭 위의 까마귀’에서와 같이 만년에 생의 목표를 재점검한다는 뜻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유명한 화폭에는 가을이 되어 생명체가 서서히 불타버리는 풍…
생각해 보니 난 꿈을 꾼 적이 없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렸을 때도 그랬다. 충청도 산골 소년이던 나는 어른들이 “순응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은 겨?”라고 물으면 “몰러유”라고 대답했다.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것이 좋았지, 앞으로 뭐가 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고교를 다닐 때도…
해마다 여름이 되면 나는 집을 떠나 강원도에서 글을 쓰며 지낸다. 집필 공간은 일정하지 않아서 사찰일 때도 있고 원주 토지문화관일 때도 있다. 올해는 모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 집에는 주말에 들렀다가 일요일 오후에 다시 강원도로 돌아온다. 이런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