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언어를 떠나서 문학으로 있을 수 있을까. 음악이 음을 떠나서 음악일 수 있을까. 언어는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자유이자 한계다. 음은 음악을 음악이게 하는 자유이자 한계다. 관가정의 계자난가를 만지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관가정은 우재 손중돈의 살림집이자 지금은 서백당으로 …
조선집을 공부하는 분들이면 으레 겪는 일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종손들과 어느 정도 알고 지내게 마련이다. 워낙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종손들도 귀찮기는 하겠지만 자기 못지않게 집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려니 여겨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미리 연락을 하고 찾는 경…
조선의 집들을 공부하면서 ‘어쩌다가 우리는 한집에서 대충 20년도 살지 못하게 됐는가’ 하고 스스로 물을 때가 있다. 집은 고사하고 마을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재개발이니, 뉴타운이니, 요사스러운 명칭에 휘둘려 기껏 살아 온 터전을 뒤엎어 버리는 게 우리의 지금 형편이다. 코흘리개였던…
호남의 정자가 집에서 집 바깥을 향해 있다면, 영남의 정자는 집 바깥에서 집으로 귀착한다. 호남의 넓은 들과 하천은 함께 생활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순행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보다는 끝없이 변화하는 대상들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한편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은 영남…
호남의 정자가 집에서 집 바깥을 향해 있다면, 영남의 정자는 집 바깥에서 집으로 귀착한다. 호남의 넓은 들과 하천은 함께 생활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순행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보다는 끝없이 변화하는 대상들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한편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은 영남…
하늘과 땅과 인간의 끝없는 변화를 살피고 그 흐름을 읽어 내려는 호남 유림의 철학적 사유가 건축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호남의 정자고, 호남 가사문학의 요체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는 뜻을 가진 면앙정은 송순(1493∼1583)이 1533년에 지은 정자다. 맹자의 진…
입춘이다. 봄은 만물이 부활하는 계절이다. 일제히 부활하니 감동이다. 예수의 부활에도 상처가 꼭 등장하듯이 그래서 봄은 잔인하다. 나는 봄이 오면 모든 생명들의 뿌리를 만져주고 싶다. 전남 담양의 명옥헌(鳴玉軒)은 항상 봄의 앞머리에 늘 생각나는 집이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의 문인 …
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의 남쪽에 환벽당(環碧堂)이 있다. 이 집을 지은 김윤제(1501∼1572)는 식영정을 지어 장인인 임억령을 모신 서하당 김성원의 삼촌이다. 그리고 이 자미탄 강가에서 놀다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에게 전격 스카우트된 송강 정철은 김윤제의 손주 사위다. 그러니까…
식영정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 옆에 있다. 소쇄원이 지어진 지 꼭 30년 후인 1560년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정자의 관리는 김성원의 후손도 아니고 임억령의 후손도 아닌, 성산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 …
문득 아침에 일어나 간절하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이 그곳이다. ‘소쇄’ 하고 입속에 넣으면 바람소리가 들린다. 소쇄소쇄소쇄, 이어서 발음하면 분명히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다. 깊고 맑을 소(瀟)자에 비바람 소리 쇄(灑)자다. 중국어로 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구식 집에 살고, 서구식 옷을 입으며 근 한 세기를 살아 온 우리에게 이제 전통이라는 것은 외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음악 미술 문학과 같은 예술도, 철학도 모조리 서구의 것을 답습하고, 새로운 종교는 전통을 아예 미신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철학도 마찬가지…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 냄새가 난다. 당연히 집에도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진한 삶의 냄새가 배어 있다. 노동자의 집에서는 노동의 냄새가, 학자의 집에서는 책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것은 옛말이다. 요즘처럼 물신주의가 판치는 때, 집에 배어 있는 …
우리에게는 세계인들과 같이 나눠야 할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많다. 그중에는 세계 최초도 있고, 심오한 예술미로 감탄을 자아내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세계 최초라는 것은 언젠가 더 앞선 연대의 유물이 발견되면 그 의미가 퇴색하게 마련이다. 규모 면에서도 한국의 지형과 지리는 중국이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