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는 풍경 ―안주철(1975∼ )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
상치꽃 아욱꽃 ―박용래(1925∼1980)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아욱 잎은 국 끓여 먹고, 상추 잎은 생것을 쌈…
만금이 절창이다 ―문인수(1945∼ )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는 것인지, …
희망(希望) ―전봉건(1928∼1988) 아름다운 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꽃과 사과이고 싶은 것은 꽃바구니의. 달빛에 씻긴 이슬을 이슬 머금은 배추가 진주(眞珠)처럼 아롱지며 트이는 아침을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를 태양(太陽)이…
후련한 수련 ―박성준(1986∼ ) 항상 얼굴의 북쪽에서만 키스를 하겠소 한 무리의 싱거움을 조롱하고 가는 입김 수련의 속내가 태양의 뿌리를 흔들며 연못을 개봉하고 가라앉은 얼굴을 꺼내 봉인해온 말을 터뜨리면 자꾸 모르는 이름만 가시를 쥐고서 여름을 방문하고 있소 외침이 될 때까…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1946∼1994)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옛 마을 풍경의 서늘한 아름다움이여, 시인의 서늘한 시선이여. 10년이나 투옥 생활을 하도록 시대의 억압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온몸으로 ‘전사(戰士)의 시’를…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
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이가림(1943∼) 송코이 강가 마을에서 연초록 풀잎으로 태어난 손, 땡볕에 그을린 웃음 깔깔거리며 고무줄놀이 하던 손, 바구니 가득 망고를 따던 손, 한 모금 처녀의 샘물을 움켜쥐던 손, 불타는 야자수 그늘 아래 물소를 몰던 손, 느닷없이 M16 총알의 …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문정영(1959∼ ) 한옥의 창문을 공부하다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다’라는 말의 봉창을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서 소개 받았다. 내다보는 것이 窓이라면 여는 것이 門이다. 분합문, 미닫이문, 미서기문에는 바라지창, 광창 등 크고 작은 창이 있다. 그 창으로 조상…
밤의 아주 긴 테이블 ―윤고은(1980∼ ) 내 집은 여기 안달루시아 그 중에서도 세비야 미스테솔 거리 74번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이야기하려면 좀 길지 오랫동안 너를 보지 못했지 수많은 밤이 흘러갔지 그러나 밤은 테이블일 뿐 긴 밤은 조금 더 긴 테이블일 뿐 너와 나는 그때부터 …
동막 갯벌 ―김원옥(1945∼ ) 송도 첨단 도시 만든다고 둑을 쌓아 놓은 그때부터 그대 오지 않았어요 하루에 두 번 철썩철썩 다가와 내 몸 어루만져 주며 부드러운 살결 간직하게 해주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검게 타버렸네요 터지고 주름투성이가 되었네요 그때는 나도 무척 예뻐서 내…
신문 ―유종인(1968∼ )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
안양천 메뚜기 ―최두석(1956∼ ) 라면 봉지, 팔 꺾인 인형 따위를 띄우고 시꺼멓게 흐르는 안양천 천변의 바랭이 풀밭을 걷다가, 떼를 잃은 메뚜기 한 마리 보았다 벼 이삭이 누렇게 고개 숙일 무렵 유년의 들판을 온통 날개 치는 소리로 술렁대게 했던 메뚜기 그래 너를 이십 년…
합창 시간 ―박은정(1975∼ ) 지휘자의 붉은 반점이 짙어졌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겠지 우리는 파트를 나누어 노래를 부른다 소프라노와 알토가 불협하고 테너와 베이스가 제 목청에 넘어갔다 강당의 커튼이 휘날린다 신의 이름을 부를수록 세기말이 즐거웠던 사제처럼 우리는 간절하게 후…
월광(月光), 월광(月狂) ―김태정(1963∼2011) 불을 끄고 누워 월광을 듣는 밤 낡고 먼지 낀 테이프는 헐거워진 소리로 담담한 듯, 그러나 아직 삭이지 못한 상처도 있다는 듯 이따금 톡톡 튀어 오르는 소리 소리를 이탈하는 저 소린 불행한 음악가가 남긴 광기와도 같아 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