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과 난감 사이 겨울나무 사이로 ―한경용(1956∼ ) 오늘도 영등포역 버스 정류소에서 심야 버스를 기다린다. 자정이 되도록 세상과 싸우는 나를 태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며 다가올 것이다. 버스가 먼저 숨이 막혀 떠나고 취객들에게 삶을 호소하는 여인들은 나뭇잎으로 떨어져 나갔다. 택…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문태준(1970∼ )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가을 프리즘 ―이경희(1935∼) 댓돌에 내려서는 상긋한 가을 아침볕을 따라 돌아서는 해맑은 풀꽃의 얼굴 뽀얗게 건조한 마당의 씨멘트 색깔에서 풀 먹인 치마폭이 파릇이 살아나는 탄력에서 어머님의 손매디가 성큼하게 돋아나는 아픔에서 다홍고추를 다듬는 재채기 소리에서 깡마른 호…
쌀 씻는 남자 ―김륭(1961∼ )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한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변기통 같습니다 아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습니다 속이 시커멓게 탄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대서(大暑) ―강웅순(1962∼ ) 염소뿔도 녹는다는 소서와 입추 사이의 대서 황경(黃經)이 120에 이르면 물은 흙이 되고 흙은 물이 되며 풀은 삭아서 반딧불이 된다 장마에 돌도 자란다는 애호박과 햇보리 사이의 대오리 토용(土用)이 중복(中伏)에 이르면 씨앗은 꽃이 되고 꽃은 …
나리꽃 ―천수호(1964∼ ) 여덟 살 때 나리꽃 화신을 본 적 있다 바위 뒤에 숨어서 긴 머리카락으로 맨몸을 가리고 있던 나리꽃 내려다보이는 사거리 바보식당을 가리키며 옷가방을 갖다달라던 암술이 긴 속눈썹 손에 꼭 쥐여 주던 쪽지도 나는 계곡으로 던져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
소문난 가정식 백반 ―안성덕(1955∼ ) 식탁마다 두서넛씩 둘러앉고 외따로이 외톨박이 하나,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내와 나를 반 어거지로 짝 맞춰 앉힌다 놓친 끼니때라 더러 빈자리가 보이는데도 참, 상술 한 번 기차다 소문난 게 야박한 인심인가 싶다가 의지가지없는 타관에서 제 식…
나의 마다가스카르 1 ―허연(1966∼ ) ―세월 하나 지나갔다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다가스카르 항구에선 이해하지 못했던 노래가 가슴을 치고 사랑 하나, 서서히 별똥으로 떨어진다 나는 투항했던가 감당 안 되는 빗물이 길을 막아버린 오…
노래방에서 ―김용원(1962∼ ) 일상이 지뢰밭처럼 느껴지는 날이면 아픈 상처로 절뚝거리며 노래방으로 간다 어느 노래인들 추억이 서려 있지 않을까 생의 모든 명제와 숙제들을 불러내어 네 박자에 모든 처분을 일임해 본다 남자라는 이유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 사랑했어요 해후, 부산갈…
얼룩무늬나비 떼 ―김은경(1976∼ ) 밤 빨래를 넌다 마당에서 백년을 산 플라타너스 검은 얼굴을 하고 바스락 바스락 수국 지는 소리 거기 희미한 그림자는 또 발에 차인 흐느낌 몸을 덮던 옷가지들 발가락엔 힘이 없고 목덜미에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일주일 치 삶이 견딘 중력의 …
연 ―신미나(1978∼ )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찌르기도 전에 너무 쉽게 부러졌다 나는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머리를 감고 논길로 나가면 볏짚 탄내가 났다 흙 속에 검은 비닐 조각이 묻혀 있었다 어디 먼 데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동생은 눈밭에 노란 오줌 구멍을…
있다 ―이준규(1970∼ )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나무에 앉아 있다. 그것은 파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그럴듯하게 가고 있다. 그것은 책상 앞에 앉아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을 빼고…
작별 ―주하림(1986∼ ) 나는 그것들과 작별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향해 가요 ―배수아 ‘북쪽 거실’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
유리창 아이 ―정철훈(1959∼) 어느 해 가을 어머니는 고향집에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집이 낡았을 테니 가봤자 마음만 상하실 거라고 대꾸했지만 구정 연휴에 슬며시 찾아간 외가는 스러진 흙담에 담쟁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안채로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선 것은 사랑채 먼지 낀 유…
도서관 ―윤덕남(1969∼ ) 고이 잠든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곳인지라 이곳에 들어찬 것은 침묵과 그림자들뿐이다. 잠든 책을 깨우기 위해서는 열과 행을 지나 고유번호에 얽힌 내력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책들도 꽂혀 있는 곳이라 잠든 책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