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을 가며 ―황규관(1968∼)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소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
고향 ―백석(1912∼1995)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 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
김 기사 그놈 ―이봉환(1961∼ ) 여보씨요잉 나 세동 부녀 회장인디라잉 이번 구월 열이튿날 우리 부락 부녀 회원들이 관광을 갈라고 그란디요잉 야? 야, 야, 아 그라제라잉 긍께, 긍께, 그랑께 젤 존 놈으로 날짜에 맞춰서 좀 보내주씨요잉 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좋다고라? 앗…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늘 거기 있는 하늘, 그러나 늘 같지 않은 하늘. 오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은회색, 막을 씌운 듯한 하늘에서 햇살이 뿌옇게 쏟아지고 있다. 시심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눈길 한 번 끌지 못할 하늘이다. 글쎄,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조각칼을 대고 싶을 것…
절 ―이홍섭(1965∼) 그 옛날에는 손윗사람을 만나면 절을 하는 게 상례였지만 요새는 거의 죽은 사람한테만 한다. 개신교 신자들은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으니까 그나마도 절을 할 일이 없을 테다. 나는 개신교 신자도 아니건만 십대 이후로 절을 한 적이 없다. 동창생 몇과 은사님을 …
들개 신공 ―박태일(1954∼ ) 벅뜨항 산 꼭대기 눈 어제 비가 위에서는 눈으로 왔다 팔월 눈 내릴 땐 멀리 나가는 일은 삼간다 게르 판자촌 가까이 머물며 사람들 반기는 기색 없으면 금방 물러날 줄도 안다 허물어진 절집 담장 아래도 거닐고 갓 만든 어워 둘레도 돈다 혹 돌더미에서…
청포도 ―이육사(1904∼1944)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
거울에게 -황성희(1972~) 그때 나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제목도 없는 시간 속으로 태양은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고 나는 마치 처음부터 빨래 건조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처음부터 엄마엄마 보행기로 거실을 누비는 저 아이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
늦여름 오후에 -홍신선(1944~ )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 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 편에나 실려 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
맛있었던 것들 ―한영옥(1950∼ ) 실한 풋고추들이 쪼개져 있었다. 쪼개진 풋고추 처음 보여준 사람은 고추전 잘 부치시는 우리 어머니 풋고추 싱그럽게 채반 가득한 꿈이 아침나절 덮어와 어머니 곁에 왔다 함께 기우는 목숨 언저리 햇살 한껏 잡아당겨 서로를 찬찬히 눈여겨두는 나물 …
한복 ―황금찬(1918∼ ) 한복 한 벌 했다. 내 평생 두루마기를 입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모두 한복을 입는데 나만 한복이 없다고 했더니 병처가 큰맘 써 한 벌 했다. 78년 정월 첫날 아침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 백…
마지막 편지 ―이정록(1964∼) 가지를 많이 드리웠던 햇살 쪽으로 쓰러진다. 나무는 싹눈과 꽃눈이 쏠려 있던 남쪽으로 몸을 누인다. 한곳으로만 내닫던 몸과 마음을 잡아당기려 나의 북쪽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이제 하늘 가까웠던 잔가지와 수시로 흔들리던 그늘과 새봄까지 다 가지…
그리움 ―아이헨도르프(1788∼1857)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나는 홀로 창가에 기대어 고요한 마을 멀리서 들리는 역마차 피리소리를 들었다. 어쩐지 가슴이 타오르듯 뜨거운 이렇게 아름다운 여름밤 저렇게 함께 여행할 사람이라도 있다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슬쩍 하기도 했다…
줄넘기 8 ―정진명(1960∼ ) 아내가 줄넘기를 한다. 스치는 발바닥으로 줄을 넘기며 사라진 줄이 만드는 둥근 공간 속에서 활짝 웃는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박자를 겨누다가 잠시 열린 줄의 틈으로 딸아이가 뛰어든다. 엄마의 방 속에서 엄마와 함께 뛰는 딸아이의 머리채가 …
흑산도 서브마린 ―이용한(1968∼ ) 흑산도에 밤이 오면 남도여관 뒷골목에 노란 서브마린 불빛이 켜진다 시멘트 벽돌의 몰골을 그대로 다 드러낸, 겨우 창문을 통해 숨을 쉬는지는 알 바 없는 서브마린에 불이 켜지면 벌어진 아가미 틈새로 하얗고 비린 담배 연기가 흘러나온다 세상의 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