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둥지 ―김예강(1961∼ ) 아파트 1층 화단 베란다 밖 어린 매화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 꼭 아기 밥공기만 하다 사람 손 눈치 보지 않고 둥지 내려놓고 있는 새 새집 봐요 빨래 널다 말고 식구들을 부른다 아이는 엄마, 주거침입, 사생활침해예요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1905∼2004)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잠들어 있지 않아요. 나는 천 갈래 바람이 되어 불고, 눈송이 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햇빛이 되어 익어가는 곡식 위를 비추고, 잔잔한 가을비 되어 내리고 있…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김충규(1965∼2012) 오늘 내가 공중의 화원에서 수확한 빛 그 빛을 몰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 남은 빛으로 빚은 새를 공중에 날려보내며 무료를 달랬지 당신은 내내 잠에 빠져 있었지 매우 상냥한 것이 당신의 장점이지만 잠자는 모습은 좀 마녀 …
마이크로코스모스 ―장철문(1966∼ ) 나는 그만 일출의 장관을 보아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침묵이 만들어내는 무한장력을 밀고 올라오는 햇덩이를. 웅덩이는 그만 침묵의 무한장력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아마도 그 순간에는 숲도 그만 숨쉬는 걸 잊었을 것이다. 그 웅덩이인지 연못인지 모를 …
그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개나 고양이나 염소나, 무당벌레나 여치나 방아깨비 앞에서 마음이 편할 것이다. 꽃도 나비도 마찬가지다. 그 앞에서는 나이도 직책도 잘남도 못남도 다 잊고 어린애처럼 순수해질 것이다. 꽃밭에서 화자는 그 부드러운 방심에 빠져 있다. 한 나비가 …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심보선(1970∼ )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애인과 나 손 꼭 잡고 통장을 만들었네 등 뒤에서 유리문의 날개가 펄럭거리네 은행은 날아가지 않고 정주하고 있다네 애인과 나는 흐뭇하다네 꿈은 모양이 다양하다네 우리는 낄낄대며 담배를 나눠 갖네 은행의 예절은 금…
첫과 끝 ―김왕노 (1957∼ ) 나에게도 내 몸의 첫인 손가락과 끝인 발가락이 있다. 나는 그러니 첫과 끝의 합작품이다. 나의 첫인 손을 내밀었다가 그 끝인 발로 이별하기도 했다. 이 수족으로 나는 한 여자에게 첫 남자와 끝 남자이기를 꿈꿨다. 나의 첫과 끝으로 사랑을 찾아가…
고별 ―김상기(1946∼ ) 아내가 많이 아프다 눈 꼭 감고 참고 있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묻는다 ‘날 사랑해?’ 나는 화들짝 놀라 대답한다 ‘그럼! 사랑하고말고!’ 아내가 생전 하지 않던 청을 한다 ‘나 한 번 안아 줄래?’ 나는 고꾸라지듯 아내를 안는다 목구멍 속으로 비명이…
되새 떼를 생각한다 ―류시화(1958∼ )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바람을 신으로 모신 유목민들을 생각한다 별들이 길을 잃을까 봐 피라미드를 세운 이들을 생각한다 수백 년 걸려 불과 얼음을 거쳐 온 치료의 돌을 생각한다 터질 듯한 부레로 거대한 고독과 싸우는 심해어를 생각한다 여자…
그해 겨울 ―김선굉(1952∼ ) 내 고향 청기마을 앞에는 참 이쁜 동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참말로 이쁘게 흘러가는 시냇물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여러 해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젊은 어머니는 동천에 가서 빨래를 했습니다. 얼음이 엷게 언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툭툭 얼음을 깨면, 그아…
개화산에서 ―박철(1960∼ )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
씨감자 ―정재영 (1963∼) 제 몸의 반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재로 다스리며 땅에 묻히지 않고 어떻게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가 될 수 있을까? 반쪽의 감자로 나누어져서야 씨감자가 되는 달콤한 상처 티눈 몇 개를 두고 온몸으로 아픔을 다스리며 슬픔의 눈을 옆으로 옮겨 붙으며 서로에게…
삼솔 뜨기 ―정영주(1952∼ ) 1 가장 깊은 그늘을 꿰매는 거야 깜깜한 무늬와 질감을 찔러 실로 음각을 뜨는 거야 흰 머리카락을 뽑아 바늘에 꿰어 깊은 우물 속, 두레박이 새지 않게 물을 깁는 거야 바느질이 목숨이었던 어머니, 실 떨어지면 명주 올처럼 길고 흰 머리카락을 뽑으셨…
이 맛있는 욕! ―이가을(1964∼ ) 근엄하신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는 날마다 가마솥에 욕을 끓인다 가마솥 절절 끓을수록 욕설이 구수하다 손님 탁자마다 돌아다니면서 욕으로 안부를 건넨다 할머니 욕해주세요∼ 저, 염병할 놈, 또 왔네 아직도 그 타령이여? 욕설을 얹어야 국밥이 맛있다…
찾습니다 ―이영혜(1964∼ ) 부풀린 어깨에 가끔씩 포효 소리 제법 크지만, 낮잠과 하품으로 하루를 때우는, 허세의 갈기 무성한 수사자 말고 해만 넘어가면 약한 먹잇감 찾아 눈에 쌍심지 돋우는, 뱃속까지 시커먼, 욕망의 윤기 잘잘 흐르는 음흉한 늑대 말고 훔친 것도 좋아, 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