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은 게 얼마 전 같은데 ‘올해도 4월!’ 벌써 한 해의 3분의 1을 써버렸다. 이럴 수가!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어영부영하지 말고 매 순간을 생생히 살아야지. 생(生)이 피처럼 내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돌게 해야지! 4월의 어느 하루, 화자는 헌혈을…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1958∼ )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 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당신과 나 사이에 2 ―장경린(1957∼ ) 그것은 나에게 없습니다 당신에게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에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그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여기에 늘 이렇게 있습니다 6과 7 사이 6과 6 사이에 있습니다 존재와 언어 사이를 지나 …
외로운 사랑 ―이성선(1941∼2001)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봄의 멸 ―최영철(1956∼ ) 추어탕이 탁자 위에 막 놓일 즈음이었다 끓는 냄새가 피워 올린 안개에 눈물이 찔끔 나려는 낮 유선방송에서 내보낸 때 지난 뉴스의 낭랑한 음성이 박노식의 죽음을 전했다 나도 한때는 팬이었지만 애도할 마음이 없는 오후를 향해 아나운서는 조금 덜 낭랑하게…
파르르 연두 ―조현석(1963∼) 살포시 실바람이 타는 천 갈래 구름의 현악(絃樂) 봄볕 좋은 물가에 앉아 귀에 고이는 소리 담는 게지 소리는 발가락 적시고 무릎으로 허벅지로 굽은 등 짚고 척추 따라 정수리 거쳐 지그시 감은 눈동자 속으로 차가운 심장 한가운데 맴돌고 맴돌아 다시 …
수묵화 필 무렵 ―이순주(1957∼ ) 겨울 지나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의 붓질, 대지는 화선지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며 선이 굵고 힘찬 획이 그어졌다 바람이 운필의 속도를 조절하여 농담을 이룬 자리 쑥을 뜯던 당신 흰 옷자락이 흔들렸다 그때필법이능란하여비백(飛白)을만들어낸바람…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60∼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
좋은 사람들 ―이현승(1973∼ ) 누군가 일요일의 벽에 못을 박는다. 텅텅 울리는 깡통처럼 인내심은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일요일의 벽에 박힌 못은 월요일의 벽에도 여전히 매달려 있고 화요일의 벽에도 균열은 나아가겠지만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은 냄새를 풍기는 자이며, 이웃은 소리…
애가(哀歌) 제14 ―프랑시스 잠(1868∼1938)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눈이 오네.” 너는 말했다. “눈이 오네.” 나는 말했다. “좀더, 좀더” 너는 말했다. “좀더, 좀더” 나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너는 말했…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정진규(1939∼ )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
가로등이 하얀 밤 ―허충순(1945∼ ) 가로등이 하얀 밤 가로등 밑에 얼굴을 쥐고 있는 사내가있다 담배는 꺼진 채 손에 들려 있다 그 손에 선인장이 자라고 있는 것 같다 거친 삶의 한켠 잠잠해진 그는 눈을 아래로 깔고 있다 모든 걸 잃진 않았다고 얼굴을 쥔 손바닥을 가만히 …
자두 ―이상국(1946∼ )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
경계 이영광(1965∼ )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
아욱국 ―김선우(1970∼ )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