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깎는 사람 ―이기인(1967∼ ) 사거리 한적한 귀퉁이에서 돌가루를 뒤집어쓴 돌 돌부처와 돌예수와 돌사자와 돌코끼리와 돌소녀가 한 반의 아이들처럼 놀고 있다 울타리가 없는 석재상 마당은 절이었다가 교회였다 가 아프리카 들녘이었다가 수줍은 소녀가 사는 외딴 집으로 변한다 한 반의 …
옛집 ―김길녀(1964∼ ) 이제 옛집 빈터에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다 버즘처럼 썩어가는 모과와 꽃바람에도 꿈쩍 않는 늙은 감나무 옆 부르튼 살결의 산수유 가지 끝에 차마 떨구지 못했던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 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 서둘러 골짜기로 찾아드는 저녁 햇살 붉다 …
선물과 명작 ―김정환(1954∼ ) 사람이 죽는 줄 알고 죽을 줄도 알지만 죽은 줄은 모르지. 죽은 자가 스스로 죽은 줄 모르고 걸어가는 혹은 다가오는 거리의 사물 형상 빛이 약간 더 생기 있다. 살아 있는지 모르고 살아 있을 때 이따금씩 우리를 놀래키는 그 빛은 때로 약간 더 멀쩡…
보순토바하 ―곽재구(1954∼ )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 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신이 내 꿈속의 마을을 방문한다면 그는 바로 저 빛깔의 사리를 입고 올 것이다 누군가 내 꿈속에서 지상의 별들을 모두 잠재울 노래를 부른다면 그는 바로 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하루의 …
바람 ―신경림(1935년∼ )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서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
가장의 체면 ―김종목(1938∼ ) 가만히 누워 있어도 욕먹는 세상이다 무언가 몸을 움직여 돈푼이라도 벌어 와서 식솔들의 목구멍에 밥이라도 떠 먹여야 할 텐데 꿈이나 잔뜩 베갯머리에 쌓아놓고 누웠으면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마누라 잔소리가 바가지로 쏟아지고 아이들의 눈빛이 번쩍번쩍…
여뀌들 ―정병근(1962∼) 다 필요 없어 제발 버려줘 잊어줘 우리끼리 잘도 자랄 테니깐, 눈 밖에서 더 잘 크는 놈들 모가지에 벌겋게 독 오른 놈들 목젖 가득 차오는 폐단을 주체할 수 없어 아무나 잡고 맞짱 뜨자는 놈들 모래밭에 떼거리로 서서 온몸을 긁고 있었다 무서워서 아들…
소녀처럼 승리하는 법 ―에이다 리몽(1976∼ ) 나는 암말들을 가장 좋아한다. 그녀들은 뭐든 쉽게 해보인다. 한 시간에 40마일 뛰어내기를 낮잠 자듯 풀 뜯듯 즐겁게 여긴달까. 나는 우승하고 난 뒤, 암말의 우쭐거림을 좋아한다. 귀를 쫑긋 세워요, 아가씨들, 귀를 쫑긋! 하지만 실…
서울대공원 ―황인찬(1988∼ ) 모르는 새들로 가득한 거대한 새장 우는 소리, 푸드덕 소리, 전부 뒤섞이며 이상한 완벽함을 선사한다 Do not feed this animal 경계선에 매달리거나 안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것보다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있다 흰 공작…
봄나무 아래 가을을 심은 날 ―곽효환(1967∼ ) 봄나무 아래에서 가을을 심었다 움트는 산수유나무 아래 꽃샘추위 들고 난 자리에 단풍나무 몇 그루 심은 오후 마른 풀 더미 물어 날라 전봇대 작은 구멍에 둥지를 튼 곤줄박이 한 마리 부산하다 그날 밤 때 아닌 큰 눈이 내리다 초봄의…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190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데.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
빙하기를 맞다 ―조동범(1970∼ ) 그녀의 가슴 위로 빙하기 지나간다 백화점 텅 빈 매장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득한 빙원의 골짜기를 떠올리고 있다 빙원을 떠돌다 모습을 드러낸 먼 과거의 죽음처럼 그녀는 선뜩한 고요에 담겨 죽음의 군락을 떠올리고 있다 쇼윈도 안의 그녀는 온몸으로 빙…
환타 페트병 ―이윤학(1965∼) 오전 내내 마룻바닥에 굴러 볕을 잘 쬔 1.5리터들이 우그러진 환타 페트병을 집어 든다. 피식 웃고 떠난 네 이름. 네 얼굴. 네 뒷모습 떠오르지 않는다. 정수기 꼭지에 대고 찬물을 채운다. 조금 남은 환타 빛 엷어진다.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갔는지 …
사우나탕에서, 쌀이시여 ―차창룡(1966∼ ) 화탕지옥에서 사우나로 땀 빼고 나오자 땀 쭉 빼고 나오자 쌀이시여 살아생전 사사건건 도와주신 쌀이시여 땀 쭉 빼고 나와서 내게 사사건건 밥이 되어주신 슬픔이시여 그렇지요 왜 그리 슬픔이었는지요 쌀이시여 당신이 흩어질까 두려웠지요 어머니는…
정신의 열대 이기철(1943∼ )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더러 초록을 입에 넣으며 초록만큼 푸르러지는 사람들 살고 있으리 그들이 봄 강물처럼 싱싱하게 묻는 안부 내 들을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