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포에 들다 ―천양희(1942∼) 갈대의 등을 밀며 바람이 분다 개개비 몇 발끝 들고 염낭게 갯벌 물고 뒤척거린다 날마다 제 가슴 위에 거룻배 한 척 올려놓는 갈대밭 산다는 건 갈대처럼 천만번 흔들리는 일이었으나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 남긴다고 다 남는 것일까 순천(順天…
무슨 소리… 고비삽화 5 ―신대철(1945∼) 양떼 따라 나선 길 풍경도 바람도 바뀌지 않는다, 뒤처진 채 지친 다리 끌고 머뭇머뭇 구릉을 내려가다 구멍 뚫린 화강암 괴석을 들여다본다, 고비 처녀는 내게 원시인 같은 녹색돌 하나를 떨어뜨리고 내닫는다 “양떼를 놓치지 말아요” 성난…
막고 품다 ―정끝별(1964∼)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었네 ―박준범(1978∼) 멋쟁이 화이바를 쓰고 멋쟁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 도시를 달린다 바람을 가르며 이 도시를 달린다 아 근데 스치는 바람에 머리가 가려워 아 근데 스치는 바람에 머리가 가려워 머리를 긁었네 아 긁어도 긁어도 머리가 하나도 안 시원해 아 …
장소들, 사랑하는 사람들 ―필립 라킨(1922∼1985) 아니, 난 한 번도 찾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장소를 이곳이 내게 적당한 곳이야, 여기 머물러야겠어 나는; 또한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그 즉시 주고 싶은 사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름까지도 주고 싶은 사람을;…
어느 밤의 누이 ―이수익(1942∼ )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가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핏기 없는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이종사촌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
검은 스웨터를 뜨는 시간 ―조혜경(1967∼) 저 별은 고양이 돋아난 털, 반짝 세우고 눈을 빛내지 조종사가 사라진 하늘에 별이 돋는다 비행기가 사라지며 비행기자리가 되고,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장갑자리가 되어 뜨는 하늘이 점점 복잡해진다 손가락을 미끄러지는 털실 하늘만큼 복잡…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1950∼)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겨울 편지 ―안도현(1961∼ )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구이(九耳) 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
부엌 칸타타 ―박은율 (1952∼) 저녁을 짓는다 부엌은 나의 제단 일상은 나의 거룩한 구유 나는 부엌의 사제 망사 커튼 드리운 서향 창 저녁놀 아래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마련한다 불과 샘 칼과 도마의 혼성4부합창 압력솥의 볼레로 냄비와 후라이팬과 주전자의 푸가 접시와 사발들의 마주…
이명(耳鳴) 강형철(1955∼ ) 1980년대 한창 어지러울 때 형사들에게 불려가 조사받느라고 철야는 했지만 워낙 피라미라 별일도 없었는데 어머니는 나라가 조금만 시끄러워도 쉰 중반 션찮은 아들 걱정이 태산이다 여동생이 모시고 사는 인천에 일주일에 한 번씩 문안 가는 일로 장남 일…
잘 가라, 환(幻) ―이규리(1955∼ )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런 때가 있다 뭔가 휙, 지나가버린 때 주방 구석에 앉아 상추쌈 먹으며 울었다 쑥갓 두어 잎 얹어 먹으며 울었다 푸성귀처럼 퍼렇게 살아 있으리라 믿지는 않았지만 지나갔다, 막막해서 입 미어지도록 …
꿈꾸는 사업 ―정복여(1958∼) 집을 한 다섯 채 지어서 세놓을까 한 채는 앞마당 바람 생각가지 사이에, 한 채는 초여름쥐똥나무 그 뿌리에, 다른 한 채는 저녁 주황베란다에, 또 한 채는 추운 목욕탕 모퉁이에 지어, 한 집은 잔물결구름에게 주고, 한 집은 분가한 일개미가족에게 주고…
서풍부(西風賦) ―김춘수(1922∼2004)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
반복의 이유 ―이성미(1967∼) 나는 너를 반복한다. 너를 알 수 없을 때 너의 이름을. 나는 언덕을 반복한다. 반복하면 너는 민요처럼 단순해진다. 반복하면 마음이 놓인다. 만만해 보이고 알 것 같고 반복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법칙이 생길 것 같다. 게임처럼 너에게도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