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한기팔(1937∼) 사면이 유리(琉璃)의 벽(壁) 같은 깊은 고요 속 낮은 산자락에 푸른 대문이 있는 그 집 빨랫줄엔 빨래가 다 마르고 바지랑대 높이 구름 그림자 지나가니 하늘은 그대로 환한 거울 속인데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온종일 사람이 그립습니다…
밤의 공벌레 ―이제니(1972∼)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들국화 ―천상병(1930∼1993)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이…… 선생님의 생몰(生沒) 연대를 옮겨 적으며 무심히 나이를 계산하다가 깜…
달콤한 인생 ―권현형(1966∼)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 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
폐가 노래한다 ―하야시 후미코(1903∼1951) 새가 빛난다. 도시 위에서도 빛난다 새가 하얗게 빛난다 거리엔 꽃가루가 흩날리고, 전신주의 꼭대기가 흔들려요 흔들리고 있어요 머물 곳이 없다. 폐가 노래한다, 짧은 경치 노래인 걸. 갈색 빗속을 나는 귀를 막고 걷는다 귀가 아파,…
폐결핵 ―박후기(1968∼) 날은 어둡고, 가는 비 내리고 가는귀먹는다 무심결에 뒤척이는 젖은 꽃잎, 골방의 한숨 섞인 수음처럼 납작 엎드린 채 부란(腐爛)하다 음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비 내리는 날 아무도 없는 집 세상에는 무수한 꽃이 있다. 장미, 백합, 국화, …
혼자 ―이병률(1967∼)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송승언(1986∼) 오랜만에 공원에 갔어 다듬어진 길을 따 라 걸으며 자주 보던 금잔화를 보려고 했지 그런데 그곳에 금잔화는 없었다 노란 게 예뻤는데 벌써 철이 지난 거구 나 생각했지 그런데 철없는 사철나무 도 마가목도 청자색 수국도 없었다 주인이 죽…
그 창 ―양애경(1956∼) 그대 살았던 집 근처를 지나면 눈은 저절로 그 쪽으로 쏠려 귀도 쫑긋 그 쪽으로 쏠려 이 각도에선 그 집 지붕도 보이지 않지만 그 창도 물론 보이지 않지만 온몸이 그 쪽으로 쏠려 세포 하나하나가 속삭여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 나부껴 이제 그대 거기 살지…
마흔 살 ―송재학(1955∼)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
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 팔 아래 다리 …
가을나무의 말 ―김명리(1959∼)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 멍투성이 핼쑥한 가을하늘이 기다리는 사람의 부러진 손톱 반달 밑에 어려서 반 남은 봉숭아 꽃물이 버즘나무 가로수 단풍진 잎자락을 좇아가는데 붉디붉은 붉나무 샛노란 엄나무 그 물빛에…
월부 장수 ―김사인(1956∼) 진눈깨비는 허천나게 쏟아지고 니미 욕만 나오고 어디로 갈까 평촌을 거쳐 옥동으로 가볼까 코흘리개 새끼들이 아슴아슴 눈앞에 밟혀오는데 즈어매는 이제쯤 돌아왔을지 빈 속에 들이부은 막걸리 몇 잔에 실없이 웃음만 헤퍼지누나 어디로 가서 몇 개 남은 …
초저녁 달 ―박형준(1966∼)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
번역의 유토피아 ―김재혁 (1959∼)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