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에게 ―조수옥(1958∼ ) 기다림의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대 몸속에 아직 차오르지 않는 꽃대의 빈 속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바람의 쓸쓸한 안부를 빈 가슴으로 적셔보는 일입니다 무수한 날이 별똥별처럼 떨어질 때 아직 봉인되지 않는 입술은 부르터 바람인 듯…
소만(小滿) ―윤한로(1956∼ )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
빈 무덤―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문충성(1938∼ ) 댓잎 바람 소리 봉분들 빈 무덤들 만들었네 시신들 찾지 못해 시뻘겋게 미쳐나 제주 하늘 떠돌다 시커멓게 멍든 혼들아! 50년도 더 지나 고작 눈물 무덤들 지어냈으니 와서 보아라! 무자년 그 처참한 삶과 죽음들 나라는 …
쫄딱 ―이상국(1946∼ )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모르는 기쁨 ―김이듬(1969∼ ) 해운대 바다야, 아니 바다 아니고 바닷가야. 작은 여자가 자기 머리칼을 한 묶음 손으로 쥔 채 몸을 숙이고 모래밭에서 한참 동안 뭔가를 찾고 있어. 그녀에게 뭘 그리 열심히 찾고 있냐고 물어보았지. 몰라도 된다고 하네. 나는 그녀가 그 백사장에서 …
울울창창 ―한세정(1978∼ ) 기다려라 관통할 것이다 나를 향해 나는 전진하고 나를 딛고 나는 뻗어나갈 것이다 손이 없으면 이마로 돌격하리라 절망이 뺨을 후려칠 때마다 초록의 힘으로 나는 더욱 무성하게 뿌리 내릴 것이다 기다려라 압도할 것이다 절망 위에 절망을 얹어 내가 절망의…
“제발 개구리처럼 앉지 마시고 여왕처럼 앉으세요” ―데니즈 두허멜(1961∼ ) ―필리핀 어느 대학의 여자 화장실 벽에 쓰인 낙서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세상은 여드름투성이 소녀에게 보상하지 않는다.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머리채에 광채…
늙는 것의 서러움 ―마광수(1951∼ ) 어렸을 때 버스를 타면 길가의 집들이 지나가고 버스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어렸을 때 물가에 서면 물은 가만히 있고 내가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버스를 타면 집들은 가만히 있고 나만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
풋사과 ―고영민(1968∼ ) 사과가 덜 익었다 덜 익은 것들은 웃음이 많다 얘들아, 너희들은 커서 잘 익고 듬직한 사과가 되렴 풋! 선생님이 말할 땐 웃지 말아요 풋! 누구니? 풋!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풋내’는 ‘풋나물이나 푸성귀 등에서 나는 (싱그러운)…
여름 뜰 ―김수영(1921∼1968)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모오든 언어가 시에로 통할 때 나는 바로 일순간 전의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
봄에 관한 어떤 추억 ―상희구(1942∼ ) 국민학교 적 소풍날 꽁보리밥에 양념 친 날된장을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갔는데 다른 친구들 모두 쌀밥으로 싸왔거니 하고 산모퉁이에 숨어서 점심을 먹었다 이 기억만은 선연한데 그날 그 소풍 간 곳이 어디였는지 그날 어머니는 무슨 색깔의 옷을 입…
4월의 하루 ―롱펠로(1807∼1882) 씨 뿌리고 거두어들이게 하는 따스한 태양이 다시 돌아와 고요한 숲을 찾으며 들판에 맨 먼저 피는 꽃을 바라보는 즐거움. 숲 사이 빈터에도 가득 찬 밝은 햇살 이제는 폭풍우 몰고 올 검고 짙은 구름도 없는 나는 이 시절을 좋아한다. 눈 녹아…
공일 ―임강빈(1931∼ )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누가 찾아올 것 같아 자꾸 밖을 내다본다 우편함에는 공과금 고지서 혼자 누워 있다 이런 날엔 전화벨도 없다 한 점 구름 없이 하늘마저 비어 있다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랴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 반갑다고 연신 …
환향 ―정수자(1957∼ ) 속눈썹 좀 떨었으면 세상은 내 편이었을까 울음으로 짝을 안는 귀뚜라미 명기(鳴器)거나 울음으로 국경을 넘던 흉노족의 명적(鳴鏑)이거나 울음으로 젖 물리던 에밀레종 명동(鳴動)이거나 울음으로 산을 옮기는 둔황의 그 비단 명사(鳴砂)거나 아으 방짜의 방짜 …
공 속의 허공 ―채필녀(1958∼ ) 공이 대문 한쪽에 놓여 있다 저 공, 운동장 한구석에서 주워왔다 그 한구석도 어딘가에서 굴러왔을 것이다 또 어딘가에서 또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무심하게 놓여진 공은 또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공은 한 번도 스스로 굴러본 적이 없다 우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