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바나 ―리산(1966∼)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걸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
그저 그런 ―백상웅(1980∼)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쏟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1967∼)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슬픈 로오라 ―이문재(1959∼) 길을 바다의 끝까지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선다 오전에 읽던 죽은 사람들의 책은 아직 열려 있고 칸나는 한 발짝도 여름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봉화촌의 아이들 산에서 멀거니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오늘은 굿당이 조용하고 수평선은 일전의 자리로 …
단 하루라도 좋으니 ―박영희 (1962∼) 단 하루라도 좋으니 형광등 끄고 잠들어봤으면 누군가와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한 번 나눠봤으면 철창에 조각난 달이 아닌 온달 한 번 보았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에서 한숨 푹 자봤으면 탄불 지핀 아랫목에서 삼십 분만 누워봤으면 욕탕에…
바다 등나무 ―데릭 월컷(1930∼) 내 친구의 반은 죽었다 네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지, 땅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옛 친구들을 그 모습대로 돌려주오, 결점이랑 모두 함께. 난 외쳤다. 오늘 밤 나는 등나무 숲을 스쳐 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에서 친구들의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외계(外界) ―김경주(1976∼)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
시상식 모드 ―박상수 (1974∼) 처음 만났지만 차라리 고백을 해버린다면 어떨까? 블랙 미니 드레스에, 펄 립글로스를 바르고는 예전부터 당신을 존경해왔어요 샹들리에 불빛 속에서, 당신은 짓밟혀왔고 평생 자신과 싸워왔군요, 그래요, 알아요, 당신이 내게 오신다면 척추가 무너진…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1965∼)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
꽃싸움 ―김요일(1965∼) 달빛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당신을 안고 붉은 밤을 건너면, 곱디곱다는 화전(花田)엘 갈 수 있나요? 화전(花田)엘 가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 아래 누워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 맡으며 능청스레 꽃싸움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새벽 별보다 찬란하게 웃고 …
날마다 설날 ―김이듬(1969∼)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
동해남부선 ―백무산(1955∼)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네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이것은 사람이 할 말 ―김소연(1967∼)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여름의 자세 ―김성대(1972∼)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를 어느 날, 기억해 냈다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로 잠이 들었다 모래알이 물결에 씻기는 여름, 잠 속으로 떠내려온 모래알 따뜻한 물결 위를 떠다녔다 발이 닿지 않았지만 많은 여름은 놓아두고 잠깐 동안의 …
지붕 아래의 잠 ―백현(1946∼) 언덕 위에 서서 재개발지역 끄트머리에 남아있는 기와지붕을 인 한옥들을 본다 부신 봄볕 아래 소멸을 예감한 듯 검은 지붕들이 어둡다 기왓골에 한 뼘 넘게 풀들이 자라고 아직은 그 아래 깃든 삶을 덮어주는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삿짐을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