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윤후명 (1946∼)철새들 乙乙乙 날아간다乙乙乙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모른다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그러나 乙乙乙고개를 들라고 날개를 친다모름이 곧 앎이니날아갈 뿐이니삶이 곧 낢이니날개를 친다너는 어느 땅에 붙박혀 있는가묻는 상형문자 乙乙乙음역하여 내 삶에 숨을 불어넣는다을을을…
하염없이 ―양선희(1960∼)누가 반쯤 가린 세상을 보려고 나는창을 닦기도 하고일간지와 주간지와 월간지와 계간지를정기구독해서 숙독하기도 하고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를 경청하기도 하고친구들과 소주를 나눠 마시며역사와 광기를 얘기하기도 하고담배연기로 혀끝에 감기는하루를 곁눈질해 보기도 하고…
앙상블 ―황병승(1970∼)골방의 늙은이들은 우물쭈물하지죽음이 마치 올가미라도 되는 양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가들인생이 마치 가시밭길이라도 되는 양알약을 나눠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녀들환각이 마치 지도라도 되는 양편지를 받아든 군인들은 소총을 갈겨대지이별이 마치…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메리 올리버(1935∼)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2 곱하기 2, 근면 등등,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성공하는 법 등등,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가을…
농약상회에서 ―함민복(1962∼ )치마 아욱마니따 고추장한 열무제초대첩 제초제부메랑 살충제아리랑 쥐약먹을 것 생산해줄 씨앗들과먹을 것 먹어치우는 것들 죽일 약들극명하게 갈라놓았다향기롭던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면역한 냄새로 판별하는 내 감각반성해보다슈퍼 옥수수슈퍼 콩슈퍼 소꼭 그리해야…
물소리 ―황동규(1938∼)버스 타고 가다 방파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조그만 어촌에서 슬쩍 내렸다.바다로 나가는 길은 대개 싱겁게 시작되지만추억이 어수선했던가,길머리를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댔다.삼십 년쯤 됐을까, 무작정 바닷가를 거닐다 만난 술집튕겨진 문 틈서리에 새들이 둥…
봄밤 ―최승호(1954∼)창호지로 엷은 꽃향기 스며들고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간다.늘 보던 그 달이 지겨운데오늘은 동산에 분홍색 달이 떴으면.바다 두루미가 달을 물고 날아 왔으면.할 일 없는 봄밤에마음은 멀리 멀리 천리(千里) 밖 허공을 날고의지할 데가 없어 다시 마을을 …
심었다던 작약 ―유희경 (1980∼)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여름이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은…
심었다던 작약 ―유희경 (1980∼)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여름이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은…
어둠의 겉봉에는 수취인이 없다 ―한석호(1958∼)시간은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마을과 길들은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저처럼 낮게 엎드려 온 마음에서일어나는 것임을.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와온(臥溫) ―송상욱(1939∼)마을 뒷산이 누워 계신 와불(臥佛)같다품 안의 젖내음 나는짐승들 누운 산이 따스하다빈 속 쓸어내는 저녁답, 이맘때면 으레 그러듯동네 삽살개 한 마리가 나룻배 닿는 갯가로 내려가저만치서 뻘밭을 나오는 아낙들을 마중한다바다 건너 화포 마을 포구에는 닻을 내…
러시앤캐시 ―김연희(1981∼)시로 쓰기에 적합한 소재가 아닐지 모른다시가 안 될지도 모른다시를 써야 하는데시가 아닌 글을 쓰게 되더라도이건 꼭 써야겠다 싶어서러시앤캐시는 나쁘다신용등급 9, 10등급도 대출을 해준다고전화번호 끝번호를 ‘친구친구’로 해놓고지하철 안에 지면 광고를 하고 …
다랭이 논 ―오세영(1942∼)깊은 바다나 옅은 강이나자고로 물고기는 투망으로 잡았다.저인망, 안강망, 정치망, 유자망, 채낚기, 통발을 던지고,끌고, 쳐서 잡는 저싱싱한 해산물의 펄떡임이여,어찌 이뿐이겠는가.나는 새,기는 짐승 역시 혹은 그물을 치고 혹은덫이나 올무를 놓아 포획하지 …
익숙지 않다 ―마종기(1939∼ )그렇다. 나는 아직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익숙지 않다.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길 잃고 헤매기만 하느니.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죽어가는 …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1962∼)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