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희롱꾼 ―보들레르 (1821∼1867)수많은 사륜마차들이 지나간 눈과 진흙의 혼돈, 장난감 등속과 봉봉과자의 번쩍임, 탐욕과 절망의 범벅, 가장 강한 고독자의 뇌리조차 혼란케 하는 대도시의 이 모든 공공연한 광란……새해가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혼잡과 뒤죽박죽의 한가운데를 채…
한 수 위 ―복효근 (1962∼)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면 자꼬 만지지 마씨요―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여펜네도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물도 안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박재삼(1933∼1997)겨울 바다를 가며물결이 출렁이고배가 흔들리는 것에만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그 출렁임이그 흔들림이거세어서만이천 길 바다 밑에서는산호가 찬란하게피어나고 있는 일이라!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그것을 받쳐주는슬프고…
시간이 사각사각 ―최승자(1952∼)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시간들이 있습니다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사각사각 아름다운 눈(雪)의 시간들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시간들도 있습니다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1952∼)가장 낮은 곳에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어떤 일이 있더라도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그런 착한 마…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정희성(1945∼ )어느 날 당신과 내가날과 씨로 만나서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우리들의 꿈이 만나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
재봉―김종철 (1947∼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아내의 나라에는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쉬고 있다마른 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눈 나린 이 겨울날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저마다 깊은 내부의 …
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맹문재(1963∼ )대학교수의 손이 왜 이래?악수를 하는 사람들은나뭇등걸처럼 갈라진 나의 손등을 보고놀라기도 하고 놀리기도 한다나는 정답 같은 당당함을 가지려고 하면서도그때마다 움츠러든다내가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 이유는위생적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려…
새와 나무― 오규원(1941∼2007)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오늘 위에 있고 몸은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작은 돌들은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존 던(1572∼1631)세상 어느 누구도 외따로운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흘러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모래벌이 씻겨도 마찬가지, 그대나 그대 친구들의 땅을 앗기는 것도 마…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김희정(1967∼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너희들이 태어나고, 제일 먼저그림자를 버렸단다사람들은 아빠보고 유령이라 말하지만너희들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마다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다음으로 버린 것은 남자라는 단어야폼 잡았던 남자라는 옷 벗어 던지…
옥수(玉水)역―박시하 (1972∼ )사랑해,공중 역사 아래 공중에게 고백을 하려다 만다군고구마 통에 때늦은 불 지피는 할머니가내가 버린 고백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이 허망한 봄날겨울을 견딘 묵은 사과들이소쿠리에 담겨 서로 껴안고 있다또 다른 출발을 꿈꾸는 걸까?아직 붉다역사가 흔들릴 때…
순창고추장―이인철(1961∼ )이슬을 닦고 장독뚜껑 열면곰삭고 있는해하나저렇게 붉으면저렇게 뜨거우면사랑처럼 단내가 풍풍 나는구나강천산 단풍보다 더 싱싱한 색이 돋는구나섬진강 한 굽이의 샘물 냄새물씬물씬솟구쳐 오르고양푼에 곰삭은 해 한 수저 떠넣고붉은 밥을 비비면칼칼한 입맛고추씨 같은 …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아요―성기완(1967∼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다던당신이떠난그곳이어딘지알수없어매우멀어바다같아요당신이남겨놓으신흔적들파도에씻긴조가비같은것들함께바다에여행갔을때당신이무릎접고고개숙이고줍던그시간이매우멀어바다같아요당신이나를버린이유알수없어걷고또걷던새벽에얻은몽유의버릇주머니에가득한물음표아…
귀에는 세상 것들이―이성복(1952∼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홍방울새 소리 나는 못 듣겠네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홍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