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준비―최영미 (1961∼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바람에 날리는 쓰레기.인간이 지겨우면서 그리운 밤.애인을 잡지 못한 늙은 처녀들이미장원에 앉아 머리를 태운다지독한 약품냄새를 맡으며점화되지 못한 욕망.올해도 그냥 지나가는구나내 머리에 손댄 남자는 없었어.남자의 손길이 …
모래밭에서―이진명 (1955∼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나는 헌것이 되었구나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모래는 흘러내리고 흘…
그대가 없다면―미겔 에르난데스(1910∼1942)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외로운 두 개의 개미집일 따름입니다.그대의 손이 없다면 내 손은고약한 가시다발일 뿐입니다.달콤한 종소리로 나를 가득 채우는그대의 붉은 입술이 없다면내 입술도 없습니다.그대가 없다면 내 마음은엉겅퀴 우거지고 회향…
여행자―전동균(1962∼)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도둑질을 일삼았다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하늘의 별을 보고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모기―김형영 (1944∼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여름밤 내내저기,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어둠을 헤매며더러는 맞아 죽고더러는 피하면서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모기들,모…
노모(老母)―전연옥 (1961∼ )스타킹은 문갑 위에 있다거 봐라 내 뭐랬니이게 출근이냐 전쟁이지내일 모레면 너도 이제 서른인데다닐 때 안경 벗지 말고또릿또릿 잘 보고 다녀야 한다참내, 구둣솔은 네가 들고 있잖니전철 안에서 또 졸지 말고건널목에서도 좌우 잘 살피고 다녀라어린애가 아니니…
해피―우영창 (1956∼ )해피가 짖는다왜 네 이름이 해피였는지궁금하지 않았다한쪽 귀가 짜부라져 해피인지다리 하나가 절뚝거려 해피인지해피인 채로 내게 건너와너는 나의 해피가 되었다지금도 네 이름이 해피인지는알 길이 없다가끔은 무섭도록 네가 보고 싶다우리에겐 깊은 공감이 있었다세상은 그…
네온사인―송승환 (1971∼)저무는 태양이 차례로 회전문 통과한 사람들 그림자를 붉은담장에 드리운다 갓 돋아난 초록 이파리 검게 물들어간다 곧장침대로 가기 꺼려하는 여인은 포도주의 밤을 오랫동안 마신다공장 폐수를 따라 하얗고 둥근 달은 강으로 흐른다 언제나 우리들은 그 가늘고 긴 새벽…
라벨과 나―김영태(1936∼2007)내 키는 1미터 62센티인데모리스 라벨의 키는 1미터 52센티 단신(短身)이었다고 합니다라벨은 가재수염을 길렀습니다접시, 호리병, 기묘한 찻잔을 수집하기화장실 한구석 붙박이나무장 안에 빽빽이 들어찬향수(香水) 진열 취미도나와 비슷합니다손때 묻은 작은…
방을 보여주다―이정주(1953∼)낮잠 속으로 영감이 들어왔다. 영감은 아래턱으로 허술한 틀니를 자꾸 깨물었다.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개켰다. 아, 괜찮아.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거야. 나는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골랐다. 책이 많네. 공부하는 양반이우. 나는 아무 말 …
수화―김기택(1957∼ )두 청년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이었다.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그때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새 말들이 비둘기나 꽃처럼 생겨나오곤 하였다.말들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
실없이 가을을―나해철(1956∼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갑자기 맞닥뜨리고빌딩으로 돌아와서일하다가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내쉬듯 전화한다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나눈다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나눌 수 있다니좋다고불현듯 생각한다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와 있어서그를 그렇게라도 보내…
눈물 소리―이상희 (1960∼ )오래 울어보자고몰래 오르던 대여섯 살 적 지붕새가 낮게 스치고운동화 고무창이 타도록 뜨겁던기와, 검은 비탈에울음 가득한 작은 몸 눕히고깍지 낀 두 손 배 위에 얹으면눈 꼬리 홈 따라 미끄러지는눈물 소리 들렸다- 울보야, 또 우니?아무도 놀리지 않던눈물 …
낙엽―레미 드 구르몽(1859∼1915)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해질 무렵 낙엽…
얼어붙은 발―문정희(1947∼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