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식사―황지우(1952∼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몸에 한세상 떠넣…
대구사과― 상희구 (1942∼)인도라는 사과는최고의 당도에다씹히는 맛이 하박하박하고홍옥이라는 사과는때깔이 뿔꼬 달기는 하지마는그 맛이 너무 쌔가랍고국광은 나무로 치마 참나무겉치열매가 딴딴하고 여문데첫눈이 니릴 직전꺼정도 은은하게뿕어 가민서 단맛을 돋꾼다풋사과가 달기로는그 중에 유와이가…
묵화(墨畵)―김종삼(1921∼1984)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몇 줄 안 되는 글로 이렇게 여운이 끝없는 울림이라니! 아마 혼자 사실 터인 할머니는 눈뜨자마자 외양간에 가, 여물통에 여물을 듬뿍 쏟아서 외동…
새들은―에밀리 디킨슨(1830∼1886)새들은 네 시-그들의 여명에-공간처럼 무수한대낮처럼 무량한 음악을 시작했다나는 그들의 목소리가소모한 그 힘을 셀 수가 없었다마치 시냇물이 하나하나 모여연못을 늘리듯이그들의 목격자는 없었다오직 수수한 근면으로 차려입고아침을 뒤쫓아오는 사람이 가끔 …
옛 연인들 ―김남조(1927∼)지난 세월 나에겐시절을 달리하여 연인이 몇 사람 있었고오늘 그들의 주소는하늘나라인 이가 많다기억들 빛바랬어도그 각각 시퍼렇게 멍이 든심각성 하나만은 하늘에 닿았고오늘까지 살아 있으니그들 저마다어찌 나의 운명 아닐 것인가그 시절 여자들은사랑하는 이에게손…
어느 새벽 처음으로―조은 (1960∼) 이른 새벽 잠에서 깼다불안하게 눈을 뜨던여느 때와 달랐다내 마음이 어둠 속에죽순처럼 솟아 있었다머리맡엔 종이와 펜지난밤 먹으려다 잊은 맑은 미역국어둠을 더듬느라지문 남긴 안경과다시는 안 입을 것처럼개켜 놓은 옷방전된 전화기내 방으로밀려온 …
《 황인숙 시인(54)이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김병희의 광고 TALK’에 이어 오늘부터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가 연재에 들어갑니다. 코너 제목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따왔습니다. 1984년 등단한 시인은 감각적인 문체로 시와 소설, 수필을 넘나드는 전방위 여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