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비슷한 시기에 한 회사에서 퇴직 권고를 받은 두 사람이 있었다. 최근에 그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억울하게 회사를 그만둔 후 한참 동안 분해서 잠도 자지 못하며 울화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폐인처럼 보내다 마음을 다잡고 밑바닥 장사부터 시작했다. 이름을 대면…
살다 보면 평수에 관계없이 집은 늘 비좁기 마련이다. 평수가 문제가 아니라 물건들 때문이다. 작은 집에 살다가 큰 집으로 이사 가면 처음에는 넓다고 좋아하지만 곧 물건이 하나둘 쌓이면서 점차 집이 좁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아는 한 분은 물건 하나를 사면 반드시 하나를 버리기로…
퇴근길, 한강대교 중간쯤에 이르면 ‘어제의 서울시내 교통사고’ 현황을 알려주는 전광판이 눈에 들어온다. 교통사고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볼 때마다 저 안에 내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항상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기계에 문외한이지만 자동차가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은…
술자리에서였다. 옆 사람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그의 앞에 앉은 사람이었다. “바빠?” “아니.” “바쁘지 않으면 술 좀 따라봐.” 술잔이 비었는데도 상대방이 모르고 있자 앞 사람이 장난전화를 한 것이다. 그 이후 우리 모임에서는 빨리 술잔을 채워주지…
영 공부를 하지 않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참다못해 “공부 좀 하라”고 다그쳤다. 중학생인 아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공부는 왜 하는데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얼떨결에 “그야 나중에 너 잘살라고 하라는 거지”라고 했더니 아들이 그것 보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공부할 필요가 없잖…
“외국까지 한복을 가져오시다니 대단하네요!” 3년 전 일본 오사카에 갔을 때였다. 오사카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만난 그녀는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렇다 쳐도 외국에서까지 한복을 입으리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깜짝 놀랐다. 한복을 입는 게 번…
그녀를 다시 본 것은 거의 1년 만이었다. 가끔씩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한참 동안 소식이 없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도 무심히 한 계절을 또 지내고 나서야 보낸 나의 안부문자에 ‘지금 요양원에 있으니 나중에 건강한 몸으로 만나러 갈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 반…
새해 모임에서 ‘꿈’ 이야기를 하다가 한 분이 “그럼 대한민국에서 꿈을 이룬 사람은 대통령뿐이네”라고 말했다. 우리 어렸을 적에 “꿈이 뭐냐?”고 물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대통령이라고 말한 기억에 빗댄 농담이었다. 순진무구하던 시절에 우리의 장래희망은 대통령 아니면 장군같이 위인전에 나…
지난가을에 미당 서정주 선생 생가를 다녀왔다. 미당 선생의 동생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미당 선생이야 천하가 다 아는 위대한 시인이지만 동생도 시인인 줄은 작년 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형님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첫 시집을 내고 오랜 세월 침묵해오다가 91…
충북 청원의 한 과수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마침 수확한 배를 포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깨끗한 백지로 싸서 고급스러운 포장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상자에 넣고 있었다. 하나는 백화점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시장으로 나갈 것이라 했다. “양쪽의 배가 …
“누구네 김치가 이렇게 맛있어?” 밥을 먹다 말고 남편이 물었다. 누구네 김치냐고 물을 만하다. 내가 ‘무늬만 주부’라고 소문이 나서 각지에서 김장김치가 당도했기 때문이다. 올겨울에도 다섯 군데서 온 김치들로 김치냉장고를 꽉 채우고도 남았다. 나는 누구네 김치인지 알기 위하여 김치…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연애 시절 크리스마스에 남편에게 장갑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날씨가 추운데도 장갑을 끼고 다니지 않았다. 왜 장갑을 끼지 않느냐고 묻자 잃어버릴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다는 것이다. “괜찮아. 내년에도 크리스마스는 또 오니까.” ‘괜찮아’라는 나의 …
3년 전 일이다. 그해 여름 내내 그분을 뵙지 못했다. 그런데 가을에 이르러 그분의 편지가 도착했다. 마지막 편지였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쓴 것이었고, 부고를 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가족들이 장례를 치른 후에 편지를 발송해 내가 편지를 읽었을 때는 돌아가신 …
비스듬히 햇볕이 드는 마루에서 등 굽은 할머니의 긴 머리를 빗겨 맵시 있게 비녀를 꽂아드리는 열 살 아이의 손놀림이 민첩하다. 할머니는 눈썰미 있는 손녀딸이 귀엽고 애처롭지만 드러내 애정을 표현하기에는 며느리와 장성해가는 손자들 눈치가 보인다. 아들이 밖에서 낳아 데리고 온 손녀딸이기…
출근하여 책상 앞에 앉으면 북한산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 어떤 날에는 구름 속에 들어가 희미한 산수화로 보이기도 하고, 겨울에는 하얀 눈에 덮여 설산(雪山)의 위용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날마다 달라지는 내 마음처럼 그 풍경 또한 날마다 다르다. 그런데 북한산을 볼 때마다 산악인 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