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로 물건을 받는 일이 잦다. 대부분은 사무적인 일이지만 가끔은 정이 듬뿍 담긴 상자를 받기도 한다. 시골에서 참기름을 짰다, 갓김치를 담갔다, 땅콩이 정말 고소하니 먹어보라며 요거조거 골고루 넣은 상자를 받을 때가 있다. 그런데 국물이 샐까, 병이 깨질세라 염려하여 얼마나 단단히 …
최근에 심상치 않은 책제목을 보았다. ‘노후파산’이다. 한때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제목만으로도 널리 회자되었는데 ‘노후파산’이란 제목 역시 관심을 끈다. 파산이 노후라는 힘없는 단어와 만나니 더욱 파괴적으로 느껴진다. 아무리 아파도 청춘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위로가 되지만 파산…
덜컥 탈이 났다.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하기, 바닥에 떨어…
졸업을 1년 남긴 아들이 전공을 바꾸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난 3년간 적성에 맞지 않아서 무척 괴로웠다는 것이다. 부모의 의견은 엇갈렸다. 엄마는 그동안 공부한 것이 아까우니 1년만 더 참고 졸업해 자격증을 딴 뒤에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고, 아버지는 그동안 적성에 맞지 않는…
집에서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길러 먹는 이야기를 하다가 ‘돌씨’를 알게 되었다. 살림의 고수인 시댁 형님은 “하루 이틀이 지나도 물에 붇지 않는 콩이 있는데 시골 사람들은 그것을 똘씨(돌씨)라고 부른다”며 돌처럼 단단한 콩을 기어이 싹트게 만든 이야기를 했다. 지난주 형님이 숙주나물…
설 연휴 직전인 지난주 금요일에 내가 좋아하는 서정춘 시인의 시 ‘30년 전-1959년 겨울’을 신문에서 읽었다. 고향을 떠나는 어리고, 배고픈 자식에게 아버지가 ‘배불리 먹고 사는 곳/그곳이 고향이란다’라고 일러 주는 구절은 가난했던 그 시절을 함축해 주는 것 같아서 읽을 때마다 가…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가 수원역을 지날 때쯤, 한 할머니가 딸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얘야, 내가 봉투 하나 냉동실에 넣어 놨다. 그 돈으로 너 변변한 외출복 한 벌 사 입으라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치는 딸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이 참 엄마는! 엄마…
새댁은 아랫집 할머니를 피해 다녔다. 툭하면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어오니 피하는 게 상수였다. 이웃 간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해해 주고 넘어가 주는 법이 없고 동네에서 다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 아줌마가 놀랍다는 얼굴로 “…
“요즘 아기들은 엄마의 등을 보고 자란대요.” 점심을 함께 먹던 간호학과 교수가 농담처럼 꺼낸 이야기다. 요즘 젊은 엄마들이 “우리 아기가 이러이러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은 질문을 하고 정보를 얻느라 컴퓨터 앞에만 붙어 있는 통에 정작 돌봄을 받아야 할 아기는 엄마의 등 뒤…
올해도 초대장이 도착했다. 해마다 잊을 만하면 고인(故人)을 생각나게 하는 이 초대장은 마침 웰다잉(well-dying)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과 맞물려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인의 아들이 마련하는 저녁 초대였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서예가 …
암 수술을 받은 지인이 운전을 하고 가다가 교통경찰에게 적발되었다. 그런데 운전면허증을 살펴보던 경찰이 사진을 보면서 “얼굴이 좀 다른데요”라고 말했다. 긴 머리가 찰랑거리는 사진에 반해 아주 짧게 자른 머리가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을 준 것이다. 그 말에 그녀는 엉엉 울고 말았다고…
추운 날 꼭두새벽에 집을 나섰다. 1년 52주 가운데 51주를 다 보내 놓고 항상 마지막 주에 이르러서야 바빠진다. 건강검진 숙제를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으나 예약이 만료되었다는 것. 다음 날 아침 일찍 오면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간호사의 귀띔에 새벽길을 택한 것이다. 해마다 마감에 …
“이 책을 모셔가는 비용(책값)은 없습니다. 다만, 출간 이후 일정 금액을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 건립기금으로 기부하신 분에게 우선적으로 배포할 예정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정본 백범일지’ 출판회에 참석했다가 읽은 안내문이다. 출판기념회에 자주 참석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
한바탕 부부싸움을 한 뒤에 아내는 6개월 된 아기를 안고 집을 나왔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오니 갈 데가 없었다. 해외근무 중인 남편을 따라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하룻밤 신세질 곳조차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친정으로 확 가버릴까 생각했지만 그건 뒷감당이 어렵고 그렇다고 집…
각지로 흩어진 네 자매가 해마다 시골에 사는 둘째의 집에 모여 사흘간 먹고 자며 김장을 하는데 올해는 배추 오백 포기를 절였다. 12월 첫 주말 시골집 너른 마당에서 일손을 보태주려고 건너온 동네 사람들까지 열댓 명이 둘러앉아 배추에 소를 넣는 장면은 마치 ‘응답하라 1965’를 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