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2가 다리와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로 향하는 길에 수년째 똑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는 걸 본다. 그 현수막에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는 간절한 글귀와 함께 실종 당시 소녀의 얼굴이 들어 있다. 눈비에 젖고 탈색되어 희미해지면 새것으로 바꾸어 걸어놓는 것으로 보아 아…
지난주에 후배랑 충남 천안시 외곽에 있는 장소를 찾아갈 일이 있었다. 미리 검색해 메모했지만 내비게이션이 고장 난 후배의 자동차가 영 미덥지 않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로 접어들 때까지는 무난했는데 한적한 지방도로로 들어서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갈림길에서 50%의 확률…
남편과 길을 걷다가 가끔 내 뒷모습이 어떤지 봐달라며 남편을 앞질러 저만치 걸어갈 때가 있다. 남의 뒤태를 보면서도 정작 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궁금해서 걸음걸이가 반듯한지, 보기 흉한 데가 없는지 살펴보라고 하면 남편의 대답은 항상 짧고 심드렁하다. “좋아, 좋아. 누가 보면 3…
남편 친구의 아들은 학창 시절 내내 B등급이었다고 한다. 여름휴가 때 만난 그는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성적이 80점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농어촌 출신 가산점에 힘입어 한 대학교에 합격했다. 그리고 아버…
10년 넘게 그분을 만났지만 요즘처럼 즐거워 보인 적이 없는 것 같다.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갔고 몸은 하늘을 날듯 가벼워 보이고 얼굴은 장한 일을 한 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장한 일을 하기는 했다. 전립샘(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하다가 최근에 큰맘을 먹고 수술을 받은 것이다. …
그녀는 이모부가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자 어찌할 바를 모르며 허둥거리던 막내이모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 나 좀 성당에 데려가 다오”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이모와 함께 성당 사무실로 찾아가 교리를 신청하러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
지난 토요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날 신부님의 주례사 첫말이 “오래 기다렸습니다. 멀리서 찾았습니다”로 시작되었다. 그 말에 하객들은 공감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신랑 신부 모두 마흔을 넘긴 데다가 신랑은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해 시카고에서, 신부는 서…
아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 놀이터에서 함께 뛰어놀던 친한 친구들이 서너 명 있다. 20년이 넘는 우정인 만큼 친구들이 모이면 별별 싱거운 소리를 해대며 키득거려서 나에게까지 웃음소리가 전달된다. “엄마, 아까 그 친구 꿈이 뭔지 알아요?”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돌아간 뒤에…
한밤중에 남편의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 부부는 스마트폰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지 않는 분이라서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고 직감했다. 더구나 쾌활하던 고음의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아주 작게 “여보세요”라고 속삭였다. “지금, 우리 집 개구리…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 합격했다는 ‘천재소녀’가 거짓말쟁이로 추락했다. 아직 어린 소녀가 당돌하고 치밀하게 거짓말을 꾸며댄 것도 놀랍지만 그 거짓말에 속아서 호들갑을 떤 어른들의 행태도 민망하다. 이번 일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학력 위조에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우스운 꼴을 보이…
친구의 남편이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친구의 지극정성으로 적잖이 회복되어 집에서 통원치료를 할 정도가 되었다.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능하고 씩씩하게 병간호를 하고 있는 친구가 동창모임에 나왔다. “얘들아, 오늘 우리 남편이 나보고 뭐…
축복받은 날이라고 생각되는 특별한 하루가 있다. 어쩌면 그런 날을 위하여 나머지 그저 그런 날들을 사는 건지 모른다. 지난 수요일 오후,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지나간 그 한나절이 지금까지 싱그럽게 남아 있다. 그날의 뜬금없는 축복은 그러나 실상 시작점이 분명하다. 나는 시를 좋…
지난 토요일에 3학년 10반이었던 친구들이 모였다.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다니러 왔다고 하여 담임선생님까지 모셨다. 여고 졸업 이후 첫 만남인 친구가 말했다. “어머, 넌 어쩜 고등학교 때랑 똑같니.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도 알아보겠다.”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운전을 하면서 번번이 속는다. 명동성당 옆길을 지나면서 ‘남산 1호 터널 정체’라는 전광판을 흘낏 보았지만 터널로 올라가는 길이 한적할 때가 있다. 다른 길로 우회할까 망설인 것도 잠시, 혹시나 하는 기대로 1호 터널로 향한 남산 길을 재빠르게 올라간다. 그러나 굽어진 길을 돌아서자마…
봄볕이 따갑다. 오죽 따가우면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옛말이 생겼을까. 그런 시어머니도 없건만 내 고향친구는 일조량이 풍부한 봄날에 연례행사처럼 장을 담근다. 친정엄마에게 씨간장과 항아리를 물려받은 덕분이다. 친정엄마의 씨간장은 친구가 어릴 때부터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