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와 만난 건 우연이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천천히 드라이브하다가 ‘이팝나무’라고 쓰인 작은 팻말을 보았다. 춘궁기에 작고 하얀 꽃을 탐스럽게 피우는 모양이 하얀 쌀밥처럼 보여서 이팝(이밥)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쯤 꽃이 피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팻말을 따라 …
새로 신청한 신용카드를 받으러 은행에 갔다. 그런데 아무리 지갑을 뒤져도 신분증이 없었다. 다행히 창구 직원의 상냥한 기억력 덕분에 신용카드는 받았지만 늘 지갑에 넣고 다니던 운전면허증이 언제부터 없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무실에서는 혹시 집에 있을까 희망을 가졌는데 …
오래전 우리 가족이 차를 타고 나들이 갈 때였다. 아빠가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가 출렁하자 깜짝 놀란 아들에게서 튀어나온 말, “아빠 때문에 위인전에도 못 나오고 죽을 뻔했잖아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위인전에 푹 빠져 있던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비슷한 상황이 또 벌…
엊그제 경북 성주에서 참외 한 상자가 도착했다. 수십 년을 친정아버지처럼 보살펴주시는 96세 선생님이 당신 고향의 특산물을 보내신 것이다. 정정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이런 것까지 보내시다니, 상자를 여니 선생님의 고향 땅에서 잘 자란 참외가 노랗게 익어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
장례식장에서 한바탕 춤과 소리가 어우러지자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은지 옆 상가(喪家)에 왔던 문상객들까지 고개를 빼고 기웃거렸다. 지난 목요일 밤이었다. 전남 남원 권번(券番)의 예기(藝妓)였던 춤꾼 조갑녀 선생이 93세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전국의 춤꾼과 소리꾼들이 하나둘 모…
아파트 마당에 목련이 엄지손가락만 한 봉오리를 맺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갸웃이 고개를 내미는 꽃봉오리가 반가워서 아침 출근길에 한참씩 들여다보곤 한다. 한 생명이 내게 온다는 건 실로 큰 기쁨이다. 꽃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
평생 봉직한 대학에서 명예교수가 된 김 교수는 어린 시절의 꿈이 소설가였다. 그런데 작가가 되는 길을 묻는 소년에게 집안 어른들은 일단 신문기자가 되라고 권했다고 한다. 기자가 되면 여기저기 세상구경을 많이 하는 데다 기사를 쓰면서 글쓰기 훈련이 되니까 나중에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
낯모르는 사람이 회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분은 어색해하면서 자기소개부터 했다. 동아일보에서 나의 글을 즐겨 읽는 애독자인데 통화를 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검색한 끝에 나의 근무처를 알아내 어렵사리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에 선운사 이야기를 쓰신 적도 있고 해서 고창을 좋아…
이상하게 이씨와 김씨를 잘 헷갈리는 후배가 있다. 예를 들어 ‘이명숙’을 엉뚱하게 “김명숙 씨!”라고 불러 옆에 있는 나까지 민망하게 만들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이씨를 김씨라고 부르면 성희롱이야”라는 농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얼버무리는데 후배는 실수를 안 하려고 신경을 쓸수록 …
나는 아직도 3월이 되어야 비로소 새해가 시작되는 느낌이 든다. 3월이 되면 상급학교에 입학하거나 한 학년 올라가면서 새롭게 시작하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마침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첫날에 고등학교 교사인 이정록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나이가 드니까 막내아들보다 어린 학생들이…
법원에서 한 어머니에게 ‘아들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들이 탐탁지 않은 결혼을 했다며 아들 부부를 4년간 괴롭혀온 어머니는 심지어 아들이 근무하는 대학에서 ‘아들을 파면하라’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비방 벽보를 붙이기도 했다니 그 모성(母性)이 참으로 딱하다. …
“여기는 하늘이다, 오버!” 지금쯤 러시아 상공을 날고 있어야 할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전 10시에 서울공항에 내려 주었는데 시간을 보니 오후 2시다. 깜짝 놀라서 ‘어디냐’고 물으니 하늘이라는 것이다. 그날이 마침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남편은 오후 2시, 우리의 결혼…
우리는 가끔 평생을 건다. 평생 당신을 사랑하겠다느니,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다느니, 이렇게 말이다. 평생을 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을 약속했다. 내가 만드는 잡지의 평생구독자를 스스럼없이 모집한 것이다. 그런 평생구…
지난주에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 들어갔더니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떡부터 내왔다. “웬 떡이냐?”고 물으니 딸이 대학에 합격해서 기쁨을 나누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3년 전쯤에 이 식당에서 점심 값을 계산하려는데 “오늘은 무료”라며 돈을 받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
강원 횡성군 안흥에 사는 형님 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아저씨가 드나든다. 외진 곳이라서 모든 것을 주문으로 구입하기 때문인데 형님은 여러 택배회사에서 오는 아저씨들을 가만히 관찰해봤다고 한다. 택배로 물건을 보낼 때 어떤 아저씨를 부를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형님 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