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암자에서 하룻밤 묵었다. 밤새 졸금졸금 빗소리가 달았다. 빗소리는 모주꾼이 술에 젖어들듯 귀에 가랑가랑 감겨 왔다. 마치 젖강아지에게 물린 발뒤꿈치처럼 ‘간질간질’ 자그러웠다. 초저녁엔 “사락사락!” 색시비가 비단신발 끌듯 조심조심 푸나무에 스며들었다. 둥글둥글 도둑고양이처럼 사…
며칠 전 몇몇 지인 앞에 지도를 펼쳐놓고 ‘거창군’(경남)을 짚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단박에 찾지 못했다. 나도 거창에 간 건 딱 두 번. 2000년 백두대간 취재 때와 2년 전이 전부다. 이렇듯 여행전문기자에게마저 외면당한 거창. ‘대한민국 구석구석’이란 슬로건 아래 이어져온…
“조천형 하사와 황도현 하사는 기관포 방아쇠를 두 손으로 꼭 붙잡고 가슴에 안은 채 숨져….” 2002년 6월 30일 경기 평택시 해군2함대 사령부 기자회견장. 전날 북한군과 지옥 같은 교전을 치른 장병들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슬픔과 울분이 뒤범벅된 흐느낌도 들려왔다. 장병들…
1920년 5월 16일 서울용산연병장(현 전쟁기념관 자리)에선 조선체육회 주최의 첫 육상대회가 열렸다. 종목은 단거리, 중장거리, 마라톤, 높이뛰기 등 15개 분야.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었다. 서울, 평양은 물론 조선팔도 곳곳에서 들썽들썽 몰려들었다. ‘흥, 그까짓 거!’…
1938년 8월 12일. 그날 동아일보엔 화진포(강원 고성시)의 서양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함경도∼강원도 동해안의 석호(潟湖)를 소개하던 ‘영동십주홍조기’(嶺東十洲鴻爪記)란 연재물인데 그날은 ‘선속결연(仙俗結緣) 턴 화진포, 백색후조(白色候鳥)의 하서지(夏棲地)’란 제목으로 서양인…
“군인은 역시 폭탄주 아니냐, 한잔씩 하자.” 2000년 9월 말 제주에서 열린 첫 남북 국방장관회담 전날 만찬장. 조성태 국방부 장관 등 남측 대표단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등 북측 대표단에 ‘폭탄주 대결’을 제안했다. 이미 허벅술(제주의 특산주)로 1인당 30잔 가까운 술을 주고…
연두가 여물어 짙푸르다. 아침이슬이 낭창낭창 어기차게 풀잎에 매달렸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또랑또랑해졌다. 온종일 숲정이가 듣그럽다. 강물주름이 널름널름 둔치 보리밭을 흘깃거린다. 버덩엔 하얀 찔레꽃이 치렁치렁하다. 덤부렁듬쑥 가시넝쿨에서 어찌 그리 순한 꽃을 다보록다보록 피웠을까. …
물건을 사겠다고 해놓고는 아무 연락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린다면? 글쎄…. 욕을 먹어도 쌀 파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일이 글로벌 인터넷쇼핑몰에선 한국인 이용자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한 사이트에 들르니 운영사로부터는 거래계좌를 철폐당하고 판매자로부터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백합 필 적에∼♪.” 가곡 ‘동무생각’의 노랫가락이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새뜻한 5월. 천지가 온통 우꾼우꾼 흥성거린다. 들판의 방죽 물이 차란차란 일렁인다. 무논엔 어느새 푸른 앞산이 떠억 가부좌를 틀고 들어앉았다. 명지바람은 슬며시 논…
지난해 3월 일본 규슈의 한 지방을 이륙한 국적기의 귀국 항공편 기내에서다. 식사 중 제공되던 음료서비스가 내가 앉은 40번 열부터 끊겼다. 40번 열 뒤쪽 좌석의 승객들은 음료도 없이 식사를 마쳤다. 나는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호출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여기에도 응대가 없었다. 그리…
요즘 TV에선 ‘밀리터리(군대) 예능’이 대세로 떠올랐다. 지난해부터 한 케이블 채널의 병영 생활을 다룬 시트콤이 인기를 끌더니 최근엔 공중파 채널의 주말 황금시간대에 연예인들의 병영 체험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두 프로그램 모두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반응도 뜨겁다. 동영상 공유 사이…
봄이 뻐근하다. 저녁놀에 부걱부걱 술 익는 소리가 들린다. 술꾼들은 ‘꽃피는 짐승’이다. 발밤발밤 주막집 골목을 어슬렁거린다. 꽃잎 어지럽게 흩어진 고샅길. 며칠 동안 가랑비와 보슬비가 갈마들며 흩뿌린 탓이다. 비거스렁이로 부는 바람이 자못 칼칼하다. 나뭇가지에 여린 잎들이 아가들 젖…
‘침묵은 금’이라고 배웠다. 말보다 행동, 실천력을 강조한 이 금언. 화려한 수사가 속빈 강정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당연한 태도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침묵이 해악일 경우도 많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침묵 때문에 폐습이 정당화된다면 그 침묵은 당연히 깨져야 하지 않을지.…
“혹시 한국에서 오셨는지….” 지난해 10월 말 미국 워싱턴 시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백발이 성성한 한 미국인 노신사가 기자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취재차 출장 온 기자라며 악수를 건네자 그는 “한국은 내 청춘을 바쳐 지켜낸 제2의 모…
햐아, 드디어 화르르 꽃망울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난주 발걸음은 너무 성급했다. 그 놈의 ‘봄 입덧’ ‘봄 울렁증’ 탓이다. 몇 번이나 전화로 묻고 채근했는지 모른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옆 붉은 홍매. 너무 붉어 검은 빛마저 감도는 수백 년 늙은 ‘흑매(黑梅)’. 사진작가들이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