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 봄이 도둑처럼 오고 있다. 온갖 생명들이 우두둑! 우두둑! 손마디를 풀고 있다. 봄은 입맛으로부터 온다. 혀는 요물이다. 겨우내 찌든 군둥내에 진저리를 친다. 입안이 온통 밍근하고 헛헛하다. 풋것에 몸이 달뜬다. 그저 발만 동동, 사무치고 애가 탄다. 사각사각 사과 깎는…
음력 동짓달 스무나흘. 뒷산 자락 마른 억새가 서걱서걱 뭉툭하게 운다. 눈 덮인 들판, 연둣빛 보리 싹이 파르르 떤다. 저 여리디여린 순이 어떻게 언 땅을 뚫고 나왔을까. 어찌 칼바람을 온몸으로 견딜까. 가시덤불의 오목눈이는 눈밭에서 낟알 한 톨이라도 찾아내 쪼았을까. 한뎃잠 멧돼지는…
겨울바다는 정갈하다. 수평선이 칼금처럼 또렷하다. 그 물금 위에 아침 햇덩이가 턱을 괸 채 웃는다. 얼굴이 말갛다. 선이 곱다. 끼룩! 끼룩! 금빛갈매기가 너울너울 하늘에 난을 친다. 통! 통! 통! 고깃배의 마른기침 소리가 곤한 바다를 깨운다. 바다는 가로금 푸른 등을 한껏 일렁이며…
빈 뜰. 빈 텃밭, 빈 둥지, 빈집, 빈 동구, 빈 마을, 빈 숲, 빈 강, 빈 하늘, 그리고 빈손…. 싸락눈이라도 오시려는가. 싸그락! 싸그락! 뒤란 대숲에서 어머니의 새벽 ‘쌀 이는 소리’가 들린다. 빈 들에 선다. 가진 것 모두 내줘 허허로운 벌판. 벌써 12월 문턱이다. 무…
햇귀가 부쩍 짧아졌다. 아침 동살이 뭉툭하게 잡힌다. ‘귀때기가 얇아지는 11월’(서정춘 시인). 막대기 두 개가 대책 없이 뼈로 서 있다. 영락없이 ‘해거름, 허위허위 빈 들판을 걸어가는 두 사내의 등 굽은 뒷모습’이다. 참새들이 쪼르르 쫑쫑 부산하다. 차가운 바람살은 조근조근 옆구…
산과 들이 노릇노릇 알맞추 익었다. 알밤이 반들반들 반지르르하다. 천방지축 누렁이도 함치르르 윤기가 흐른다. 이맘때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어딜 봐도 저절로 눈이 살찐다. 비구름 벗갠 산머리엔 눈썹달이 요염하다. 푸른 달개비꽃처럼 샐쭉한 손톱달. 언뜻 시퍼렇게 벼려진 버들낫 같다.…
시월. 가을이 날로 수척해진다. 뒷동산 솔숲이 정갈하다. 가슴에 숭숭 바람구멍이 뚫린다. 먹먹하다. 푸른 으스름 달빛에 뼈가 시큰하다. 허허 쓸쓸. 왜 수컷들은 하나같이 가을을 탈까. 정말 ‘가을은 시(詩)’라서 그럴까. 문득 황순원 선생의 단편 ‘수컷퇴화설’이 떠오른다. 소설 …
달빛이 흐뭇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논두렁의 생풀 냄새가 싱그럽다. 발아래 차르르! 차르르! 차이는 이슬방울들. 걸음마다 달빛싸라기가 우수수 부서져 발목까지 시리다. 도대체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함민복 시인). 훌쩍 한 걸음 다가온 앞산. 시냇물에 담뿍 담긴 하늘. 산…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고슬고슬하다. 선득선득 살갗이 싱그럽다. 찌르르! 찌르∼ 여치가 길섶에서 가늘게 운다. 귀뚤! 귀뚜르르∼ 수컷 귀뚜라미가 애절하게 암컷을 부른다. 푸른 달빛싸라기가 강변 코스모스 꽃길에 그릇을 부시듯 와랑와랑 쏟아진다. 아, 가을인가. 앞산 너머 지리산가리산 애처롭…
자귀꽃이 요염하다. 실쭉샐쭉 눈썹달이다. 발그레 피어오른 몽실몽실 꽃구름. 간질간질 깃털부챗살. 건듯 바람에 공작의 날갯짓으로 가늘게 떤다. 연분홍 목화솜털 꽃숭어리가 비에 젖는다. 담장 너머 능소화가 하늘거린다. 넘실넘실 할금할금 웃는다. 임금님 발자국소리 들으려고, 까치발로 서성이…
층층이 피었던 산딸나무꽃이 가뭇없이 이울었다. 희고 노란 바람개비 마삭줄꽃도 숙지고 있다. 담벼락의 붉은 장미꽃만 웅긋쭝긋 너울댄다. 덥다. 몸이 축축 처진다. 입안이 영 탑탑하다. 생고무 씹은 듯 타분하고 모름하다. 그렇다. 대책 없이 쌈밥이 ‘땡긴다’. 한민족은 배달민족인가? …
덥다. 시부저기 봄이 가버렸다. 전혀 낌새조차 챌 수 없었다. 건성건성 간당간당 사는 탓이다. 그저 숨 쉬고, 밥 먹고, 닭 모이만큼의 벌이에 매달렸다. 어느새 찔레꽃 만발이다. 뒷산 자욱길에 하얀 꽃들이 산드러지게 웃는다. 그렇다.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어머니가 이…
주꾸미는 못난이다. 이름부터가 쪼글쪼글 볼품없다. 영락없는 ‘쭈그러진 깡통’이다. 어디 맏형 문어에 비길 수 있을까. 문어(文魚)는 팔척장신(2∼3m) 헌헌대장부다. 이름도 글월 ‘文(문)’이다. ‘문자 속을 아는 물고기’인 것이다. 경상도 양반 제사상에 괜히 오르는 게 아니다. …
냉이, 달래, 미나리, 봄동, 풋마늘, 딸기, 풋콩, 날배추, 톳, 해파리, 꼬막, 소라, 멍게, 고둥, 오징어, 주꾸미, 쪽파강회, 삶은 다슬기, 마늘종 마른새우 무침, 삶은 새우 호박무침, 생두부 김치, 굴보쌈, 조기조림, 가오리찜, 파전, 굴전, 누룽지, 뽀글뽀글 청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