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토요일 한국에 온 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일산이라는 곳에 거처도 구했고,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에 원어민 영어 강사로 취직도 하게 되었다. 나보다 반년 먼저 이 땅에 자리 잡은 토니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토니와 나는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같은 칼리지를 졸업…
땅은 잘 파지지 않았다. 삽날이 언 땅을 때릴 때마다 둔탁한 쇳소리가 어두운 전나무 군락지 너머로 길게 퍼져 나갔다. 밤은 깊었고 무릎을 스치는 한기는 더더욱 뾰족해져 갔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나는 삽질을 하면서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남양주에서 부천으로, 그리고 다시 …
강당은 이미 만원이었다. 추첨 시간까진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강당 맨 첫 번째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빈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기수 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강당 맨 끝 구석, 접이식 철제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 한 명이 커다란 저금통 모양의 추첨함을 단상…
1. 그 여자의 경우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그녀는 늘 지갑이 얄팍했다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그 나머지를 위해 수능이 끝난 직후부터 계속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네. 편의점 계산대에서 새벽을 맞을 때마다 그녀는 하루하루 자신의 용돈 기입장에 앞으로 벌어야 할…
지난 일요일 오후의 일이었습니다. 모처럼의 휴일인지라 늦잠을 자다가 정오 무렵 부스스 깨어나 짜장 라면 두 개를 끓여 먹었지요. 그러고도 몸이 계속 나른해 자취방에서 뒹굴거리며 재방송되는 개그 프로그램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때는 단풍철인지라 하늘은 동해처럼 깊고 푸르게, 사방…
아내가 분만실로 들어간 후, 그는 대기실 장의자에 차마 앉지 못한 채 계속 문 앞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장의자엔 대신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첫째 아이를 앉혔다. 첫째 아이는 ‘뽀로로’ 장난감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연신 ‘엄마, 엄마’를 외쳐댔다. 두 눈은 계속 분만실 쪽을 향해 있…
할아버지 제사 바로 전날 토요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작은아버지 내외와 첫째 고모, 둘째 고모 내외 모두 우리 집에 모였지요. 우리 할머니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온 식구가 다 모인 거라고 했습니다. 나랑 같은 방을 쓰는 우리 할머니는 올해 일흔다섯 살이신데, …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요. 하 참, 기가 막혀서. 다른 집 남편들도 다 그런가요? 그래요, 맞아요. 우리 집 남편 얘기를 좀 하려고요. 저요? 이제 결혼 9년 차가 된 주부예요. 아니요. 전업주부는 아니고요, 1년 전부터 생활비에 보탬이라도 될까 해서 아파트 단지 앞 마트에서 시간…
그가 아이들 세 명을 차에 태우고 양평 근교 계곡을 찾은 것은 7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휴가 첫날이자, 초등학교와 유치원이 서로 짜고 고스톱이라도 친 듯 일제히 방학에 들어간 날이기도 했다. 그는 양평까지 차를 몰고 가는 내내, 아침 식탁에서 아내와 했던 가벼운 …
“그러니까 일종의 강박증 같은 거라니까.” 202호 남자가 말하자, 총무실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그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곳,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명성 고시텔’에서 3년째 총무일을 맡고 있다. 4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고시텔로 운영…
살다 보면 별의별 황당한 일들을 다 겪는다고 하지만, 거 참, 내가 이렇게 지하철 수사대에 끌려오게 될지, 그래서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팔 대 이 가르마를 탄 사십 대 초반의 경찰과 마주앉게 될지, 단 한 번이라도, 상상으로라도 가정해본 적은 없었다. 이게 뭔가? 나는 계속 헛웃음…
나한텐 두 살 터울의 고종사촌형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이 형이 어렸을 땐 나한텐 참 아픈 존재였거든. 그도 그럴 것이 이 형네 집은, 그러니까 우리 고모부 집은 우리 사는 작은 도시 한복판에서 커다랗게 약국을 했거든. ‘다복약국’ 집 외아들하면 우리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그래, 아버지 산소까지 갈 필요도 없다. 여기가, 여기가 오히려 더 적당하다. 나는 깜빡이를 넣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새벽 세 시 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신탄진 방면 ‘졸음 쉼터’엔 정차한 트럭 한 대, 가로등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성의 없이 만든 나무 모형…
이번엔 십칠 층이었다. 한 층에 계단이 열아홉 개씩 있으니까 십칠 층이면 삼백이십 개가 넘는 계단이었다. 이제 진짜 이놈의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오늘까지만, 오늘까지만…. 그런 생각으로 나는 가게 문을 나섰다. 오늘만 벌써 아홉 번째 배달이었다.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
구청에서 삼십 년 가까이 근무한 그의 아버지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농한 것은 재작년 구정 무렵의 일이었다. 수영 교실이다, 문화센터 노래 교실이다, 서울에서 이런저런 일들로 바빴던 그의 어머니는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끝끝내 아버지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황혼 이혼을 할 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