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여름, 친구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 동물을 사랑하지만 고기를 즐겨먹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친구가, 그 중심에 가족이 있었음을 깨닫고 하나씩 문제를 풀어가는 내용이었다. 가장 사적인 이야기가 스크린 위에 펼쳐지자 관객들은 울고 웃었다. 나도 …
대학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그 식당은 끝내 문을 닫았다. 십수 년 동안 보수 한 번 하지 않은 낡은 간판에 불이 꺼진 지 두어 달 만의 일이었다. 갑갑할 때면 즐겨 찾던 동네 노래방도 점포를 내놓았다. 거리 두기 1단계 조정을 맞아 반가운 마음으로 찾았다가 ‘임대문의’가 나붙은 문…
최근 한 시인이 그의 인스타그램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서울 반포와 강 건너 용산 언저리를 떠돌면서, 다리에도 올라가 보고 종로 어디 건물에도 올라가 봤다가 ‘누군가 흉물을 치워야 하겠구나, 그게 평생의 상처로 남겠구나’라는 생각에 그만뒀다고 한다.…
생일에 ‘질의 응답’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30년 가까이 여성의 몸으로 살았지만 나의 ‘질’에 대해선 너무 몰랐다며, 만나는 여자들마다 선물하고 다니는 친구 덕분이다. 이 책은 여성 성기에 관한 잘못된 정보 때문에 여성들이 도리어 수치심을 가지는 현실을 자각한 노르웨이 의사 니나 …
오래전 홀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을 때 일이다. 비수기여서인지 단체 관광객들이 갈 만한 동선을 피해 다녀서인지 한국인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다 캔맥주라도 사려고 들어선 편의점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여기가 좋…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 변호사는 조던 피터슨의 강의를 듣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피터슨은 캐나다의 임상 심리학자이자 문화 비평가로서,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그 선배 변호사는 짬이 날 때마다 피터슨의 강의를 들었는데, 특유의 시크한 표현과 직설적…
요즘 매일 감사일기를 쓴다. 평범한 하루에도 감사한 일이 정말 많다. 며칠 전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 무엇도 기대되지 않는 공허가 찾아왔다. 하지만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기에 슬픈 순간에도 ‘죽고 싶어’ 같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울면서 “지금 너무 슬프지만 곧 좋…
비가 퍼붓던 날, 한 스튜디오를 찾았다. 오래전부터 기대해 왔던 사진 촬영을 위해서였다. 천편일률적인 증명사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찍어준다는 곳이다. 예약 경쟁이 엄청나다는 후문에 지레 겁을 먹고 엄두를 못 내던 터였다. 운 좋게 대표 작가님 시간을 쟁취할 수 있었다. 여…
전셋집의 임대차 계약이 곧 종료돼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아내와 생후 200일이 된 딸과 함께 살 집이기에 이것저것 꼼꼼하게 살폈다. 아스팔트 바닥에 올린 콘크리트 아파트, 성냥갑처럼 켜켜이 쌓인 층 중에 단 한 채만 몇 년 빌릴 뿐인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
내가 아는 어떤 남자애는 장거리 연애의 달인이다. 영어를 잘해서인지, 모험을 떠나는 사람을 좋아해서인지 애인이 늘 외국에 있다. 모두가 집에 있는 시기에, 이 친구라면 그 방면에 도사일 것 같아 물었다. “너 ‘롱디(Long Distance의 줄임말·장거리 연애)’ 전문가지? 떨…
템플스테이로 충북 보은의 법주사를 다시 찾았다. 입사를 앞둔 2013년 방문 이후 꼬박 7년 만이다. 3시간 반을 달려 속리산 터미널에 닿았다. 불자는 아니지만 사찰 특유의 맑은 안락함이 심신을 정돈해주기를 기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수행하는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정갈한 옷가지를 받…
하남시에 있는 한 막국수 음식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리밥에서 작은 돌이 나왔고, 손님들은 이에 항의했다. 종업원은 연거푸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했다. 손님들은 식사를 계속했고,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손님들은 식사를 마친 다음 계산대로 향했는데, 손님의 첫마디는 “음식값 …
직장인 친구가 연기학원을 등록한 적이 있다. “너 영화배우 될 거야?” “그건 아니고, 그냥… 좀 달라지고 싶어서.” 소심한 성격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너의 매력은 소심함에서 오는 조심스러움인데… 자신의 기질을 발전시켜야지 반대로 가려 하네.’ 하지만 나 역…
나의 청첩장은 비행기 티켓 모양이었다. ‘From Single To Married.’ 언어도 문화도 다른 ‘유부월드’로의 편도행 티켓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일상의 모든 순간을 여행처럼 살아내고자 하는 다짐의 산물이었다. 며칠의 고민 끝에 적은 초대 문구의 시작은 이러했다. ‘여행이 취…
나는 철학을 전공했고, 위대한 철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특히 ‘장자’를 사랑했는데, 20대 가난했던 시절에도 서점이나 헌책방에 ‘장자’ 책이 보이면 꼭 사서 모았다. 나는 결국 지적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철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했다. 꿈이 없어진 나는 20대 중후반 ‘던져진 현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