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 아르바이트 중 가장 시급이 높은 것은 강의였다. 대학생 해외 봉사단 100여 명에게 영상 만드는 법을 가르쳤는데 2시간에 26만 원을 받았다. 정신없이 첫 번째 강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생각했다. ‘이거다! 이것이야말로 적게 일하고 많이 벌 수 있는 근로소득의 첫 단추다…
각종 마감이 밀려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던 때였다. 흐름이 끊기는 것이 싫어 졸릴 때마다 3시간씩 토막 잠을 자며 몸을 혹사시키기를 며칠째, 그날도 공부방에 한참을 박혀 있다가 거실로 나왔더니 테이블 위에 웬 상자가 놓여 있었다. 건강기능식품이 담긴 상자 위에는 건강관리를 부탁하는 내…
대학 시절 시장통에서 술을 참 많이 마셨다. 20대 초반의 우리는 항상 술이 고팠지만, 돈이 없었다. 친구들 네다섯이 소주를 열 병 이상씩 마셨지만, 안주는 1만∼2만 원 하던 감자탕 하나밖에 못 시켰다. 이모는 인심 좋게 고기 몇 덩이를 더 얹어 줬고, 웃으며 국물을 매번 채워 줬다…
사법부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사법부를 위한 보드 게임이 있다. ‘이지혜 게임’이다. 게임의 목표는 이지혜의 생존이다. 사회성, 순응도, 자존감, 감수성 중 하나라도 0이 되거나 스트레스가 100이 되면 이지혜는 사망한다. 게임의…
“야, 시간 미쳤어(순화하면 ‘시간이 미친 듯 빨리 간다’, 의역하면 ‘너무 오랜만에 본다’)!” 옛 친구들을 만나면 인사치레처럼 주고받는 말이다. ‘먹고사니즘’이 녹록지 않다 보니 아무리 자주 보자 다짐해도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다. 며칠 전에도 못 본 지 한참 된 친구와 약속을 …
축구 서포터스 활동 덕에 20대 초반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잦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도중 한 친구가 내게 “이 형 GD네, GD”라고 말했다. GD가 뭘까. 얼마 전 전역한 유명 가수 지드래곤을 떠올렸지만 그분은 나와 같은 국적인 것 빼고는 공통점이 없었기에 용기를 냈다. “GD가 뭔…
온갖 운동에 도전했다 실패하는 편이다. 어디 운동뿐이랴. 삶도 포기투성이다. 책도 사놓고 안 읽고, 하루에 영어 한 문장 외우기도 신청해 놓고 안 하고, 유튜브 콘텐츠 만들기에 대한 인터넷 강의도 하나도 못 듣고 기간이 만료됐다. 묘비명에 ‘작심 3일로 평생을 살다 감’이라고 써도 모…
약속이 있어 이른 퇴근 후 택시를 잡아탔다. 이태원 언저리를 지나는데 사람들로 북적였다. 좀비 분장의 무리를 보고서야 핼러윈 전 마지막 금요일이구나 싶었다. 부러움 반 호기심 반 쳐다보고 있는데 택시 기사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남의 나라 명절에 왜 이 난리들인지. 취직 힘들다더니…
너 ‘마이너’한 취미를 가졌구나? 언제 들어도 묘하게 기분 좋은 말이다. 나의 정체성과 타인의 경계에 획을 긋고 있지만 마니아에는 속하지 않는, 그 어떤 중간 지점에 잘 안착해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마이너한 취미를 몇 개 가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축구 경…
올해만 해도 결혼식을 몇 번이나 갔는지 모른다. 페미니즘 열풍으로 ‘비혼(非婚)’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젠더 갈등으로 탈연애를 선언하는 이들이 많지만 여전히 주말 예식장은 예약으로 가득 차 있다. 축의금을 가슴에 품고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오늘도 출동이다. 헐레벌떡 택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곧잘 던지는 질문이 있다.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얼핏 ‘소개팅’ 멘트 같지만 상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게 없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취미가 같아 급속도로 친해지기도,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가령 한없이 수줍어 보이는 동료가 주짓…
어쩌다 지금껏 네 번이나 이직을 했다. 경력이 8년이니 업계 특수성을 감안해도 꽤나 방랑하듯 일해 온 셈. 그러나 이직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행사다.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던가, 외려 직면할 때마다 새삼스럽다. 업무 정리와 적응도 고되거니와 최고봉은 늘 감정적 요인이다. 새로운 동료…
사람들은 때때로 남을 불쌍히 여기며 동력을 얻는다. 탈북자의 스토리를 보며 눈물짓는 마음에는 얼마간의 공감, 안쓰러움, 그리고 저 구석진 곳엔 안심이 있겠지. 결혼 안 한 여성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보통의 가족을 이룬 본인 삶에 대한 자부심, 낑낑대며 원피스 입고 있…
높아진 하늘에서 제법 가을 냄새가 난다. 23일이 절기상 추분(秋分)이었다. 가을의 본격적인 시작인 백로(白露)와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寒露) 사이, 비로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땅거미가 내려앉은 퇴근길 풍경 앞에서 새삼 선조들의 지혜에 탄복한다. 가을이 왔다…
휴가차 동티베트에 다녀왔다. 일정 중 며칠을 초원에 머물기도 했으니, 간쯔 허허벌판에 세워진 낡은 수도원에서 숙식을 해결한 덕분이다. 잠자리는 가히 극기훈련이라 할 수준. 다만 음식은 썩 훌륭했다. 20년 넘게 홀로 수도원을 운영한 노승은 직접 키운 작물 몇 가지로 뚝딱 별미를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