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좌우명은 ‘좋가치’다. ‘좋은 건 같이 보자’의 줄임말이다. 중학교 시절, 시험이 끝나고 함께 볼 비디오를 빌려 오는 건, 반 아이들의 mp3 플레이어에 음악을 채워주는 건 늘 나의 임무였다. 숨은 보석을 세상에 알릴 때 가장 뿌듯함을 느꼈다.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널리 퍼뜨리는…
지난여름, 기록적인 폭염을 피해 러시아 동부로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작은 항구 도시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으로 유명하다. 국적기로 2시간 30분, 외국 항공으로 북한 상공을 지나면 2시간이면 닿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도 한다. 물가도 저렴해 잘만 …
4년 정도 됐나? 가족 또는 그에 준하는 사람의 결혼식 외엔 찾지 않고 있다. 잠깐 인사하고 밥 먹는 게 고작인 행사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다. 축의금도 안 보낸다. 그 몇 푼이 악순환의 씨앗이니까. 줬으면 돌려받길 바라고 받았으면 갚고자 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우리의 혼례 문화가 …
월세가 지긋지긋해 전세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동네 부동산을 지나칠 때면 유리에 붙은 전단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정을 말하니 전세자금대출을 추천했다. ‘내 인생에 빚은 없다’는 생각으로 한평생 체크카드만 써왔는데 대출이라니! …
올 3월 나를 제외한 모두가 친구인 자리에 끼어서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깍두기’가 된 것도 서러운데, 심지어 나로 인해 테이블 전체가 정적에 휩싸인 순간까지 있었다. 전채요리로 아란치니(이탈리아식 튀김 요리)가 나왔을 때, 내가 그만 ‘설날’이라는 주제를 고안해 내고 …
오늘 지하철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출구 계단을 향해 개찰구에서부터 긴 줄이 무려 한 줄로 이어져 있었던 것. 에스컬레이터도 아니고 폭이 꽤 넓은 계단이었는데, 사람들 질서의식이 대단하다 싶었다. 그들 중 몇몇은 앞을 쓱 보고는 갸우뚱해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며 줄을 지…
증권사에 잠시 재직하며 기업·산업 분석 보고서의 품질을 개선하는 일을 담당한 적이 있다. 그때 업계에서 통용되는 몇몇 문구를 보고선 묘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증권사 보고서는 업황, 실적, 주가 등에 주목하기에 대중이 주로 접하는 기사, 칼럼 등과는 감정의 결이 제법 다르다.…
7월 2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인 남성이 여권을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다. 오후 11시 30분경 리티이니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막 재즈클럽을 벗어나 우버 차량을 기다리던 피해자는 말을 걸어오는 라틴계 남성과 실랑이하게 됐고, 차량에 탑승한 후에야 주머니 속 여권이 사…
요즘 내 친구들 사이에선 특별한 의식이 유행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기 전, 손가락 욕을 날리는 것. 어디선가 찍고 있을지 모를 몰래카메라를 향한 제스처다. 처음 들었을 땐 조금 웃겼다. ‘진짜 그런다고? 그런데 사람 오줌 누는 걸 왜 찍어?’ 순간 잊고 있었던 그날의 일이 떠올…
결혼 전 엄마와 둘이 터키 여행을 다녀왔다. 미혼 딸로서는 마지막으로 오붓하게 엄마와의 시간을 누려 보기 위해서였다. 여행을 준비하고 다녀오고 곱씹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전 ‘엄마’라는 단어 뒤에는 붙여보지 않았던 낯선 단어 몇 가지를 떠올렸다. 취향, 하루, 꿈. 국가를 고르는 것부…
글을 써서 먹고살다 보니 여기저기의 여론을 살펴보는 편이다. 어떤 이야기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해서다. 한데 둘러볼 때마다 느끼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담론장 곳곳에 분노와 무시가 스며 있다는 것이다. 완화는커녕 점점 심해져서 이젠 그 둘이 우리 사회의 담론을 지배하고 …
친구가 말하길, 1년 전쯤 붓과 벼루를 샀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따금 내키는 글자를 써보곤 한다고. 정확히는 ‘휘갈긴다’고 표현했으나 듣고 있으려니 꽤 정적인 감흥의 취미 같았다. 이를 테면 좋은 선 하나 그을 때마다 시간을 들여 흐뭇해하는 식이랄까. 언젠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먹을 …
열한 살 어린 여동생과 오랜만에 외출했다.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데 동생이 물었다. “언니, 이렇게 입으면 싸 보여?” 살짝 붙는 티셔츠였다. 동생은 가슴이 크다. 예전의 나였다면 입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야, 너 그런 옷 입으면 남자애들 눈요깃거리 돼.” 엄마도 내게 그렇게 말…
또 한 명의 지인이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큰 배낭을 멘 사진과 함께 해시태그를 남겼다. ‘#지금이아니면안될것같아서.’ 그의 선택을 응원하고 그 확신이 부러운 한편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나의 5년 전을 떠올렸다. 합격자 발표일, 긴장을 추스를 길이 …
두 갈래의 애국심을 한곳에서 만났다. 한국과 멕시코의 월드컵 경기를 앞둔 6월 23일 늦은 오후의 광화문광장이었다. 한쪽에선 거리 응원을 위한 스크린을 설치하며 슬슬 분위기를 띄우는 가운데 다른 한쪽에선 현 정권을 규탄하는 태극기 집회가 한창이었다. 한발 떨어져서 이를 보노라니 묘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