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는 남자가 있었다. 경기도 출신, 85년생, 05학번의 재수 입학생. 대학 시절 그가 자신의 존재를 가장 강렬히 알린 무대는 첫 동기 MT였다. 입담이나 족구 실력 때문은 아니었다. 술자리를 동분서주하며 ‘재수생의 호칭과 존대’에 대한 철학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요즘 말…
친구의 기일을 맞아 인천가족공원에 갔다. ‘가족’과 ‘공원’이 합쳐지면 ‘추모시설’의 다른 이름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장례식엔 가 보았지만, 그곳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벽면 가득 투명한 서랍 속엔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액자 속 사진과, 뼛가루가 담긴 유골함이 있었다. 친구…
“식사하시죠.” 낮 12시 30분,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설 때 ‘맛있게 드세요’ 눈인사로 의사 표현을 대신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정보기술(IT) 회사의 분위기 덕이 크겠지만 고맙게도 누구 하나 핀잔을 주지도 캐묻지도 않는다. 그제야 다이어리와 책 한 권을 챙겨 나와 ‘혼밥’을 즐긴…
서울시장 선거 현수막 한 장이 여기저기서 놀림당하고 있다. ‘출근시간 30분 빠르게’라는 문구 때문이다. 우리 언어 관습에서 이는 ‘30분 일찍 출근’으로 해석될 공산이 크다. 프리랜서인 나조차 흠칫할 정도인데 직장인의 반응은 오죽하겠나. 단축, 짧게, 줄이자 등으로 표현했으면 아무 …
매해 이맘때쯤, 몇 년 전 한 어부가 들려준 말을 떠올린다. 어부이자 시인인 남자. 운을 떼고 보니 다소 낭만적 뉘앙스가 감도는 듯한데, 사실 그의 말이란 나를 무방비로 폭소케 하는 ‘웃음 지뢰’다. 여름 별미를 주제로 한 원고 청탁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요, 사람들이 처먹으러…
5년 만에 MBC 공채가 떴다. 서류전형 없이 지원자 모두 필기시험을 치르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시험장은 인산인해였다. 1교시 상식 시험이 끝나고 2교시 작문 시험 제시어가 공개됐다.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을 쓰시오.’ 여기서 비밀이란 사건이 아닌 ‘유일무이한 생각’이었다. 나는…
대학 휴학 당시 대학로 소극장에서 보조연출로 일했다. 딱히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단순한 동경과 호기심에서였다. 최고의 문화생활이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연극이던 시절이었다. 객석 뒤에서 조명과 음향을 만지면서 초반엔 사고도 참 많이 쳤다. 하지만 노력 끝에 100분짜리 공연의 대사 한…
정말이지 이건 마법 주문과도 같다. 사회 곳곳의 다양하고 복잡한 부조리가 제목의 한 문장으로 뭉뚱그려지기 때문이다. 3년 전 ‘땅콩회항’ 사건의 피해자인 박창진 대한항공 사무장이 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보니 이를 더욱 확신하게 된다.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된 그가 그동안의 외로운 투쟁에 …
어머니와 도쿄에 다녀왔다. 올해 1월에. 대뜸 4개월이나 지난 어머니와의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게 ‘2030세상’의 ‘5월’ 첫 원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은, 그간 이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30대 남성의 ‘모친 동반 여행기’를 듣고 싶어…
하루는 단톡방 알림으로 시작된다. ‘좋은 아침, 셔터 올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출근하는 친구가 외친다. 대화라기보다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허공에 던지는 행위에 가깝다. 단톡방이 생기고 대화의 패턴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누군가 생일이면 꼭 단톡방에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 “땡…
바야흐로 벚꽃 시즌이다. 연이어 최고 기온이 20도가 넘으면서 때아닌 이른 개화를 맞았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예정되어 있던 벚꽃 관련 행사 일정을 앞당기는 등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봄 손님맞이에 애를 먹고 있다. 마음이 급하기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아직 나들이 일정도 채 잡지 못했는데…
만약 누군가가 삼성증권에서 벌어진 일을 먼저 소설로 썼다면 나는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너무 작위적인 스토리 아닌가, 국내총생산(GDP) 세계 11위 대한민국 증시가 무슨 야바위판인 줄 아느냐 등의 반응을 보였을 듯하다. 내가 틀렸다. 소설로도 차마 못 쓸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클…
이런 문구를 읽을 때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매체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곱씹을 여지가 있어 동의하지 않는 논리에도 목소리를 준다니. 이런 세련된 태도를 두고 ‘톨레랑스’, 즉 관용이라 하던가. 원고 주제를 주지하고자 전화를 걸었…
프리랜서인 게 싫었다. 그래서 개인 사업자를 냈다. 하지만 1인 사업자는 프리랜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여전히 불안했다. 그러다 미래 일자리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목차엔 이런 소제목이 있었다. ‘신인류의 새로운 직업, 프리랜서’.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종자가 태어난다. 고…
“와버렸어.” 작년 이맘때쯤 인도 여행을 다녀왔다. 희롱과 거짓말이 판친다는 이야기만 믿고 ‘죽어도 인도만큼은 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땅으로 마음 한편엔 줄곧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한 나라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오기에는 턱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