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원래 이렇게 숱이 없었냐? 요즘 힘든 일 있어?” 얼마 전 몇 년 만에 뭉친 군대 시절 전우들은 날 보자마자 왜 이렇게 늙었냐며 농을 쳤다. 술자리라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계속 그러니 신경이 쓰였다. 전날 야근에다가 새벽까지 글 쓸 일이 있어 그렇다고 둘러댔지만, 기회를 틈타 …
학기 첫날, 나는 대혼란에 빠졌다. 준비된 자기소개를 하고 앞으로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들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하루가 끝난 뒤의 리셉션 자리에서 벌어졌다. 그저 그런 가벼운 대화를 나눌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좁은 방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가며 처음 만난 …
가난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가 망설여질 때, 주말에 모임을 자꾸 피하고 집에만 있을 때, 동창회에서 “그래도 넌 네가 좋아하는 일 하잖아” 같은 말을 들을 때. 가만 듣던 친구는 웃었다. “가슴 아프게 자꾸 그런 말 할래?” 영화를 꿈꾸는 …
아버지와 대립이 고조되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까지 다녀온 후였으니 사춘기의 치기도 아니었다. 사소한 시각차가 뜬금없이 자라나 큰 소리가 나곤 했다. 내가 알던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대화는 끊기기 일쑤였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전투는 주로 식탁에…
며칠 전 애매한 관계인 지인과의 팔로를 페이스북에서 취소했다. 친구 관계까지 취소하면 상대가 기분 나빠할까 봐 내버려 두었다. 평소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편향적인 그의 글과 공유하는 자료가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 타임라인에 뜬 그의 글은 역시나 불편한 지점이 많았다. 굳…
주변에 유학을 간다는 얘길 꺼냈을 때, 이것저것 해보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도서관에만 있지 말고 열심히 놀러 다니고, 옷도 한번 괴상하게 입어 보고, 아무나 만나 가벼운 데이트도 해보고, 클럽에 가서 밤새 시답잖은 시간도 보내 보고, 심지어는 최대한 문란하게(?) 살아 보라며 진지…
이상하다. 9, 10월에 왜 이렇게 생일이 많지?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 생일파티 초대장을 받았다. “그게 다 크리스마스 때문이래.” 10월 1일 생일인 친구는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12월에 아이를 가지면 9월 말∼10월 초에 출산한다고. 역시 연휴는 길고 볼 일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살다 보니 선진국이 뭔지 알겠어.” 뜬금없는 선진국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말을 꺼낸 후배는 외국으로 이민 가 자리 잡은 지 5년이 넘었다. 그는 스스로 선진국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느낀 선진국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선진국이 무엇일까. 그게 …
장애 아이를 둔 한 부모가 “제발 아이들 학교는 가게 해주세요. 도와주세요”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 대표들도 이에 질세라 무릎을 꿇었다. “우리도 좀 도와주세요. 가양2동 좀 살려주세요.” 그렇게 특수학교 설립 2차 주민공청회는 파행됐다. 나는 강서구…
며칠 뒤면 드디어 꽤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유학길에 오른다. 최소 1년이라는 시간을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고, 먹고, 살림을 살 걱정에 몇 번을 싸고 풀었는지 모를 짐은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러다간 나보다 내 물건을 비행기 태우는 게 더 비싸겠다 싶어, 그동안의 준비 과정에서 벽…
살면서 들어본,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말 중 하나는 영화 동아리 선배의 고백이었다. “나는 외로울 때마다 영화를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흠칫했는데, 첫째는 그 사람이 영화광이었기 때문이다. ‘저 선배,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어?’ 24세의 나는 세련된 인간이라면 외로움을 드…
매서운 새벽 바람에 눈물이 얼어붙어 볼이 버석거렸다. 겨우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에 무슨 정이 그리 깊게 들었을까. 뿔뿔이 흩어지는 훈련소 동기들을 맨눈으로 보기 어려웠다. 서로를 보내며 부른 우리의 군가는 울부짖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해 터지는 눈물이…
며칠 전 ‘공부가 가장 쉽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버스광고를 보았다. 1996년에 나와 뭇 학생에게 좌절감을 안겼던 베스트셀러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오마주인가 싶었는데 ‘공부 방법만 알면’이라고 붙은 말을 보니 그제야 공부법을 가르쳐주는 업체광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꽤 …
장마가 지나간 자리에 작열하는 태양처럼, ‘프로듀스 101’의 돌풍이 지나간 뒤의 2017년 여름은 그들을 응원했던 ‘국민 프로듀서’들에겐 그 언제보다 뜨거운 계절이 되고 있다. 올봄 우리를 웃고 울렸던 연습생들이 보이그룹으로, 솔로 가수로 멋지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최근 드라마PD 시험을 보았다. 시험엔 이런 문제가 나왔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순간 얼마 전 읽은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에서 주인공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