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가 없는 결혼 3년 차 주부이다. 유부녀 경력으로는 아직 병아리에 불과하지만 미혼 남녀들에게는 나름대로 선배 노릇을 하느라 결혼이나 연애에 관해 조언을 해줄 일이 종종 있다. 누군가의 인륜지대사를 두고 섣불리 말하는 것이 참 조심스러운 일이라, 보통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
나는 이제야 부모님의 집에서 나와 늦은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 대학과 직장이 멀지 않아 굳이 나올 필요를 못 느꼈다. 덕분에 서른 살 먹도록 부동산이라든가 계약, 대출 같은 일에는 문외한이었다. 이번에 신접살림을 꾸밀 집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대한민국의 ‘민낯’을 맞닥뜨려야 했다. …
보건소 1층에 걸린 시곗바늘이 9시에 가깝다. 출근길 의사가 등장하자, 대기하던 눈동자들이 일시에 쏠린다. 팬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연예인이 되어 꾸벅 인사하고는, 진료실 의자에 털썩 앉는다. 평균 연령 75세의 고객님들. 이미 사회의 계급장 다 뗀 이분들에겐 ‘안 아픈’ 노년이 최고다…
퇴근 후 페디큐어 서비스를 예약해 둔 날이었다. 업무 마무리가 늦어지면서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을 것 같아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바쁜 마음으로 허겁지겁 도착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자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아유, 10분도 안 늦으셨는데 뭘 이런 걸로 그러세요. 더한 분도 …
얼마 전 서울 부산 전북 지역 초등학교 아이들이 각기 모여 잘 놀 수 있는 학교 환경을 만들기 위한 참여 활동을 진행했다. 이때 나온 이야기 중 몇 가지다. “책걸상을 접이 식으로 만들고 교실도 크게 만들어서 친구들과 다치지 않고 놀게 해주세요.” “학교에는 음악실, 미술실, 체육관,…
#2016년 8월. 올림픽이다. 개최 도시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는 겨울이란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룬 탓일까, 겨울에 열리는 여름 올림픽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12시간 시차로 환산되는 물리적 거리보다, 덥고 지친 대한민국에서의 심리적 거리감이 올해 올림픽을 멀게 한다. 특히, 많은 …
어떤 식당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메뉴판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돈만 내면 남들처럼 똑같이 먹을 수 있는 요리 말고 식당 주인이 특별히 그 손님을 위해 만들어 주는 음식이 진짜라는 뜻이다. 붙임성 좋은 평소 성격 덕분인지 단골 가게 주인들의 너그러운 마음 씀씀이 덕분인지, 종종 …
한 친구가 컵밥집을 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쩡히 직장 잘 다니던 친구가 왜 갑자기 컵밥집인가 싶어 오랜만에 연락을 해봤다. 친구는 곧 있으면 개업을 앞두고 있는데 한번 놀러오라는 말과 함께 명대사를 날렸다. “너 아직 거기 다닌다고 했지? 그냥 거기 있어. 회사 안은 전쟁터,…
니체가 ‘신(神)의 죽음’을 이야기하자 ‘신의 뜻’은 사라지고 ‘나의 뜻’만 남았다. 비로소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고 피로해졌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약속을 대신해 건강과 무병장수는 이 시대 최고의 가치가 …
한동안 뜸했던 지인에게서 연락이 오면 무척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든다. 며칠 전 만났던 선배 역시 그랬다.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관두고서 야심 차게 사업을 시작했던 그였는데, 순조롭게 자리를 잡아가나 싶었던 일이 결국 실패로 이어져 몸도 마음도 자산도 피폐해졌다는 얘기를…
나는 아이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아이들의 권리에 민감하고 인권의식이 투철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30여 년을 되돌아보면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동권리나 인권을 배운 적도 없고, 사실 관심도 …
사무실 뒷동산에 들풀들이 많이 자랐다. 인적이 뜸한 곳에는 토끼풀 무리가 무릎까지 닿을 기세다. 흠뻑 내린 비를 맞고 자란 초록은 하늘과 바람, 태양과 잘 어우러져 우리네 바쁜 일상 곁에서 초여름 뜨거운 생명력을 내뿜고 있는 중이다. ‘매미 울 때가 된 것 같은데.’ 늘 도심 가운…
얼마 전 ‘성시경의 축가’라는 공연 예매 포스터를 보고서 엄마 생각이 대뜸 났다. 엄마는 성시경의 대단한 팬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큰 체격이 주는 든든함과 감미롭고 달콤한 목소리가 좋다며 곧잘 그의 노래를 듣곤 했다. 새 앨범을 한창 들을 때는 몇 곡조를 흥얼거렸고 나와 함께 드라…
“저는 엄마, 아빠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또 그럼 안 될 거 같기도 해요. 매일 일해도 돈이 없어서 힘들어하는데 나랑 시간 보낸다고 일을 줄이면 못 살 거 같아요. 학원도 가야 하고, 용돈도 써야 하니까. 돈이 줄지 않고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는 없는 건가요?”…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주무시다 일어나서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히는 일이 잦았다. 한겨울 바람이 쌩쌩 부는 창가에 앉아 한참이나 가슴을 두드린 후에야 다시 잠을 청하시곤 했다. 날씨도 추운데 왜 창문을 열어두느냐고 내가 투정하면 속에서 열불이 나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