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교실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너 god야, 신화야?” 대답을 강요받을 때마다 질문자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결국엔 더 친해지고 싶은 쪽의 답안을 따라가곤 했다. 친해서 같은 취향을 갖게 된 것인지 취향이 같아서 친해진 것인지는 모…
나는 지금 20년 넘게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는 이모네 집 마당 그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여행을 오니 기후도 정반대, 자동차 핸들 위치도 정반대, 거기다가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여다보게 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멋있는 자연…
지금 원고를 쓰고 있는 곳은 배경 음악이 꺼진 카페다. 이곳은 음악을 틀어 두는 매뉴얼까지 있는 회사다. 그런 만큼 음악이 없으니 평소와 분위기도 달랐다. 이유가 궁금해 직원께 여쭸다. 애도기간 방침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태원 참사 후 멈춘 건 배경 음악뿐만이 아니다. 각종 분야의 …
일요일 아침 엄마에게서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집에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도리어 내가 괜찮은지 물었다. 이태원 갔냐고. 그때야 2022년 10월 29일 밤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고를 알게 되었다. 나도 아는 곳이었다. 내가 어릴 때 이태원은 아무 때나 가는 곳이…
동경하던 언니가 있었다. 똑똑하고 상냥한 데다 패션 센스까지 갖춘 K는 이른 20대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직장인이 된 그는 맛있는 밥을 사주겠다며 신촌의 한 파스타집으로 나를 불렀다. “회사에 출근하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 진심…
얼마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내 글에 같은 일을 하는 누군가가 아무런 설명 없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댓글을 남겼다. 우물 안 개구리는 ‘1) 넓은 세상의 형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견식이 좁아 저만 잘난 줄로 아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현관문 밖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옥상을 드나드는 이웃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다. 나는 오래된 빌라의 옥상 가는 길 꼭대기 층에 산다. 빌라 옥상에는 아주머니들의 장독대나 빨래 건조대가 있다. 아주머니들의 일상과 직결된 공간인 셈이다. 아주머니들은 옥상에 올라가는 길에 만나면 인사를…
할머니는 1959년부터 서울 종로구 뒤편 세검정의 서민형 한옥에 살았다. 올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쯤 그 동네의 재개발이 시작됐다. 할머니와 평생 함께 산 고모는 평생 산 동네도 떠나야 했다. 이번 추석은 할머니와 우리 옛날 집 없이 처음 맞는 명절이었다. 다같이 고모의 새집에 갔…
한 고등학교로부터 작년에 이어 강의 요청을 받았다. 글쓰기 수업을 곁들인 진로 특강이었다. 작년 이맘때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에는 잠시 망설였다. 내 진로도 모르겠는데 강의는 무슨? 그럼에도 불구하고 덜컥 승낙을 했던 것은 깨질 땐 깨지더라도 기회가 오면 일단 덥석 물고 보자는 스스로…
얼마 전 경기 안산의 한 서점에서 ‘저 청소일 하는데요?’를 출간한 김예지 작가와 함께 북 토크를 하며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꿈을 이루기까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른 일이 필요했고, 그래서 청소 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청소 일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
“조만간 가볍게 커피 한 잔 가능하실까요?” 퇴근길 소셜미디어 링크트인을 통해 받은 메시지다. 발신인은 모 기업의 인사 담당자. ‘커피 한 잔’의 목적은 이직 제안이다. 몇 년 전이라면 ‘어느 회사의 무슨 팀에서 어떤 경력을 가진 사람을 찾으니, 관심이 있으면 이력서를 보내라’는 공식…
젊은 지인이 책을 썼다며 내게 추천사를 부탁했다. 지인은 나보다 열 살쯤 어리다. 세련된 염소수염을 기르고 통 넓은 바지를 입는 등 옷차림도 멋지다. 승낙하고 책을 읽었다. 사람들이 ‘취향’이라 부르는 개인적 기호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아주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근본적인…
올 초 단짝 친구 M이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만날 엄두를 내기란 역시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처음으로 함께 동네 맛집을 찾았는데 내내 행복하다 노래를 불렀다. 도보 거리에 이렇게 확실한 행복이 있었는데, 뭐가 그리 바빠 얼굴 한 번을 못 봤을까. “야! 다음 주에도 봐! 아지…
이제 다음 달이면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도배를 한 지 만 3년이 된다. 당당한 도배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고 요즘은 후배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며 일을 하고 있다. 현재 내가 속해 있는 팀은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 청년 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팀은 한 현장에 들어가 …
“나 자신을 아는데 그런 테스트는 필요 없다.” 뮤지션이자 성공한 사업가인 박재범 씨가 K팝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MBTI 유형을 묻는 질문에 한 대답이다. 이 말이 반가웠다. 나도 MBTI 부정론자이기 때문이다. 한편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는 그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사실 소극적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