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큰 관심 없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어느 날 저녁 TV 화면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을 것이다. 한 기업인이 울먹이며 자기는 MB맨이 아니라느니, 박근혜 정부를 세운 데 공이 있다느니, 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의 문제를 마구 논할 수 있는, 그렇게 중요하고 비중 있는…
길모퉁이 새로 생긴 옷가게 윈도에 찢어진 청바지가 주렁주렁 걸려 있다. 배꼽 티는 몇 년을 못 버티고 사라졌는데 찢어진 청바지는 거의 기본 패션으로 정착한 듯하다. 내가 푸코의 철학 만화책을 내면서 에피스테메 이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찢어진 청바지를 예로 든 것이 1995년. 그때만…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몸이 중요한 적은 없었다. 전통 사회의 농민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에 매혹된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육체를 감상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고,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은 자기 몸에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몸은 오로…
날카로운 눈매와 도도함이 사람을 압도하는 듯하여 보통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상류층의 전형이었다. 한국 최고 부자의 딸이면서 계열사 사장에, 미모와 젊음까지 갖추었으니 오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허를 찌르는 의외의 광경이었다. 주주총회에 한쪽 발목에 깁스를 …
플라톤의 우화 중에서 아마도 가장 대중적인 우화는 인간의 자웅동체설(雌雄同體說)일 것이다. ‘향연’에서 들려주는 이 전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공처럼 둥글게 생긴 구형(球形)이었다. 팔이 넷, 다리가 넷, 둥근 목 위에 머리는 하나, 똑같이 생긴 얼굴이 반대 방향으로 둘이 있고 귀가 …
꽃밭에 앉아 꽃잎을 보며 고운 빛이 어디서 왔을까 묻는 정훈희의 ‘꽃밭에서’부터, 내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와 꽃이 된 김춘수의 ‘꽃’을 지나, 근대 미학의 기초가 된 칸트의 꽃까지, 꽃의 스펙트럼은 한없이 넓고 다채롭다. 과연 인간의 모든 심리를 표상하는 상징이고 은…
“유학자도 아닌, 변방의 일개 무장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고 있어요. 이성계가 역심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작년에 인기를 모았던 TV 사극 ‘정도전’에서 고려 말의 권신(權臣) 이인임이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이다. 개국공신 조준도 이성계에게 “이 책을 읽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다. 마이너스 경제 성장과 유례없는 청년실업, 그리고 악화일로의 재정 적자에 빠져 허둥지둥 우파의 친기업 정책까지 채택했던 그는 이달 초까지만 해도 지지율 19%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인기가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
‘Not to fall was too hard, too hard’(추락하지 않기는 너무 어려워, 너무 어려워). 대학 다닐 때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어느 소설 중 한 구절이다. 소설 제목도 가물거리고 문장의 맥락도 생각나지 않지만 이 구절은 평생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채 오만을 경…
눈보라 몰아치는 광활한 부두, 수만 명의 군중이 거대한 군함을 향해 달려가는 첫 장면부터 내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호머의 대서사를 능가하는 장관이요, 스펙터클이었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피란민들 사이에 끼어 불타는 트로이 성을 탈출한 아이네이아스처럼 먼 훗날 한국의 신화는 금순…
현대사회에서 ‘부르주아’라는 말은 부자 혹은 상류층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 단어는 귀족의 지배를 받는 특정 계급의 이름이었다. 중세 봉건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 계급은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에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당시 도시의 명칭이 부르(bourg)였으…
만일 당신이 어느 날 경기 과천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캄캄한 전시실 안에 들어갔다고 치자. 환하게 밝은 반대편 벽면에서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리고 그 아래 대리석 대(臺)에는 하얀 수의를 입은 사람이(아마도 시체가)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맞으며 누워 있다. 물소리 가득한 어둠 속에서 …
프랑스의 한국계 입양아 출신 문화부 장관 플뢰르 펠르랭이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펠르랭 장관은 2012년 봄 입각한 이래 2년 동안 수많은 보고서, 서류, 뉴스를 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역시 여성인…
“바스라지기 직전의 비단, 광택 없는 배경, 기하학적으로 날카롭게 각이 진 사다리꼴의 커다란 검은 관복, 이것은 고요함의 위대한 양식이고, 엄격한 하나의 건축, 또는 절대 기하학이다. 초상화 자체가 ‘영웅’이라는 단어의 표의문자이며 그대로 하나의 상형문자이고, 사자를 저승으로 실어 나…
광화문 앞 광장을 운전하며 지날 때는 우툴두툴한 바닥이 차바퀴와 부딪치는 덜커덩 소리와 요동치는 승차감이 싫다. 유럽 같으면 촘촘하게 돌이 박힌 도로가 로마시대의 흔적이거나 최소한 수백 년 전 마찻길이어서 도시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유산이지만 길이 500m 왕복 10차로의 아스팔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