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잠에서 깬 아이는흐릿한 눈을 비비고엄마를 부르며 울기밖에 할 줄 모른다부를 이름조차 잊은기억의 건너편 저 어둠뿐인 세상 밖에서불빛이 비치는 풍경은따뜻하기도 해라나는 또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나길잡이별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가만히 혼자 걷는 이 길이 멀기도 하다―장시우(1964∼…
어느 날이었다.산 아래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많은 일들이또 있겠지만,산같이 온순하고물같이 선하고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내 어찌 모르겠는가.나는 이런생각을 오래 하였다.―김용택(1948∼)사람은 세상 없이 단 하루도 살 수가 …
이별한 후에는 뭘 할까 두부를 먹을까 숙희가 말했다내 방에서 잤고 우리는 많이 사랑했다 신비로움에 대해 말해봐 신비로워서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숙희는 말했다눈이 내렸을까 모르겠다 신비로워서 만질 수 없는 것을 나는 모른다 두부 속에 눈이 멈춘 풍경이 있다고 두부 한 모에 예배당이 …
서쪽 하늘에저녁 일찍별 하나 떴다깜깜한 저녁이어떻게 오나 보려고집집마다 불이어떻게 켜지나 보려고자기가 저녁별인지도 모르고저녁이 어떻게 오려나 보려고―송찬호(1959∼)송찬호 시인의 작품만 가지고 한 달 내내 글을 쓰라고 해도 쓸 수 있다. 올해의 모든 주에 그의 시만 가지고 칼럼을 쓰…
(생략)만인의 것이면서누구의 것도 아닌 너너와 나는 이인삼각애환 함께 하였건만어느 날 고개 돌릴 너끝내 얼굴 없는 너번지 없는 빈 집에문패 달랑 걸어 놓고온데간데없는 너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너그러나천지에 꽉 차서없는 곳이없는 너.―장순하(1928∼2022)1월의 고역은 2024년…
못 박힌 사람은못 박은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네가 못 박았지네가 못 박았다고재의 수요일 지나고아름다운 라일락, 산수유, 라벤더 꽃 핀 봄날아침에 떴던 해가 저녁에 지는 것을 바라보면못 박힌 사람이 못 박은 사람이고못 박은 사람이 못 박힌 사람이고못 자국마다 어느 가슴에든 찬란한 꽃이 …
다친 길고양이가 따라오면 내 뒤의전 세계가 아프고녹슨 컨테이너 아래 민들레는다시 한번 잃을 준비가 되어 있다멀쩡하게 서서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악이 된 기분이 든다현실이라고 하는말도 안 되는 자기 자신은밤 고속도로 위의 불빛 같은현실감 하나로 스스로를 견디고 있었다(하략)―조…
장판에 손톱으로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마음이라면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요를 덮고한 사흘만조용히 앓다가밥물이 알맞나손등으로 물금을 재러일어나서 부엌으로―신미나(1978∼ )겨울에는 우리의 본능이 따뜻함을 알아본다. ‘이 옷보다 저 옷이 따뜻하다. 여기보다 저쪽이 따뜻하다. 저 사람은 …
겨울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이다시린 발을 구르며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 해도기다리는 것이다이따금 위험한 장면을 상상합니까 위험한 물건을 검색합니까 이를테면,재빨리 고개를 젓는 것이다남몰래 주먹을 쥐고 가슴을 땅땅 때리며(중략)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지나…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단추를 채우는 일이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누구에겐가 잘못하고절하는 밤잘못 채운 단추가잘못을 깨운다그래, 그래 산다는 건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
원효로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돌아보니 등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뒤돌아보는 사람은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무등…
여기까지 왔구나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옛날이었는데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그랬었는데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박남준(195…
저녁 무렵 대문 앞에 와 구걸을 하던 동냥아치가 마당에서 놀던 어린 내게 등을 내밀자 내가 얼른 그 등에 업혔다고 누나들은 어머니 제삿날에 모여 그 오래된 얘기를 꺼내 깔깔거리고 내가 맨발로 열무밭 앞까지 쫓아가 널 등에서 떼어냈단다 오늘도 어김없이 남루한 저녁은 떼쓰는 동냥아치처럼 …
앞산엔 가을비뒷산엔 가을비낯이 설은 마을에가을 빗소리이렇다 할 일 없고기인 긴 밤모과차 마시면가을 빗소리―박용래(1925∼1980)기침을 근심하는 것. 이것은 11월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즈음의 수업 시간에는 기침하는 학생이 많다. 간질간질 한번 시작된 기침은 의지로 그쳐지지 않는…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귀뚜라미가 울고 있다.가을을 가져다 놓고저렇게 저렇게 굴리어다 놓고둘러 앉아서모두들 둘러 앉아서귀뚜라미가 울고 있다.귀뚜라미가 울고 있다.(중략)휘영청히 달밝은 사경야 밤에자지도 않고모두들 둘러 앉아서소매 들어 흐르는 콧물을 씻어가며저렇게 저렇게귀뚜라미가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