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품에 안고 지붕을 오르는 사람이 있다/해풍에 보채는 슬레이트 지붕을 묵직히/눌러놓으려는 것이다 나도 여울을 건너는 아비의 등에 업혀 있던 바위였다/세상을 버리고 싶을 때마다 당신은 나를/업어보곤 하였단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혼자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그때 나는 새였다 새…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흰 항아리가 되어 작은 꽃들과 함께 네 책상 위에 놓이고 싶다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 토끼의 두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
선한 이여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네가 활보하다가 잠들던 땅을, 나를 기다리던 땅을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선한 이여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어떻게 벗어날…
맷돌구멍 속 삶은 콩들이 쭈뼛쭈뼛 자리를 바꾸는 까닭은 너 먼저 들어가라 등을 떠미는 게 아니다 온 힘으로 몸을 굴려 눈 뜨고도 볼 수 없는 싹눈을 그 짓무른 눈망울을 서로 가려주려는 것이다 눈꺼풀이 없으니까 삶은 눈이 전부니까 ―이정록(1964∼)1930년대에 시인 …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육탁(肉鐸) 같다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하략)―배한봉(1962∼ )
삼짇날부터 쭉, 초가 제비집 옆에 새끼를 밴 어미거미 베틀에 앉았다 북도 씨줄도 없이 ―김춘추(1944∼ )한국인에게 제비는 낯설지 않다. 제비를 본 적도 없는 어린애들도 이 새를 안다. 심지어 좋아한다. 이게 다 ‘흥부와 놀부’ 때문이다. 이야기 속의 제비는 은혜와 원한이…
흰 서리 이마에 차다 무릎 덮는 낙엽길 구름 비낀 새벽달만 높아라 가을 별빛 받아 책을 읽는다 단풍잎 하나 빈 숲에 기러기로 난다 ―이희숙(1943∼)열일곱 번째 절기, 한로(寒露)가 찾아왔다. 이 바쁜 세상에서 누가 절기를 기억할까. 한로는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점점 잊혀지고 …
인간의 공포가/세계를 떠돌고 있다 알 수 있는/사실 비슷한 모양의 빌딩이 줄지어 서 있다 비슷한 모양의 아파트 단지 비슷한 모양의 마음 성내고 있다 사소한 것들/두 손 가득/쓰레기봉투 계단 내려가다 우수수 쏟아지는/냄새나는 것들 주저앉아/도망쳐버릴까/생각했었다. … 문 앞에 …
세상에 큰 저울 있어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유경환(1936∼2007)가을 하늘이 높아지면 갑자기 세상이 확 넓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착시라도 좋다. 눈앞의 공간이 넓어지면 우리의 생각은 …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누군가 용서하며 울고 싶은 날/바다로 가자 나는 바다에서 뭍으로 진화해 온/등 푸른 생선이었는지 몰라, 당신은/흰 살 고운 생선이었는지 몰라 바다는 언제나 우리의 눈물 받아/제 살에 푸르고 하얗게 섞어 주는 것이니 바다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
다시 태어나면 산동네 비탈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사는 이들에게 시원한 바람이나 눈송이를 배달해주는 씩씩한 택배기사가 되었으면 좋겠네 재벌과 플랫폼 업자들이 다 나눠 먹고 티끌 같은 건당 수수료밖에 안 떨어지는 이승의 목마른 비정규직 택배 일 말고 인생에 꼭 필요한 사랑의 원…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 줄기 바람으로 따라 나선다. 때에 절은 살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
언젠가 식탁 유리 위에 한 줌의 생쌀을 흩어놓고 쇠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으니 어느새 눈물이 거짓말처럼 멎는 거야 여전히 나는 계속 울고 있었는데, 마치 공기 중에 눈물이 기화된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또 너는 운다 나는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쇠젓가락을 가지고 네 맞은편에 …
풀밭에서 무심코 풀을 깔고 앉았다. 바지에 배인 초록 풀물 초록 풀물은 풀들의 피다. 빨아도 지지 않는 풀들의 아픔 오늘은 온종일 가슴이 아프다. ―공재동(1949∼ )얼마 전만 해도 사람들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셨는지” 서로의 안부를 물었는데 지금은 좀 …
네가 길바닥에 웅크려 앉아 / 네 몸보다 작은 것들을 돌볼 때 / 가만히 솟아오르는 비밀이 있지태어나 한 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 생경한 언덕 위처럼녹은 밀랍을 뚝뚝 흘리며 / 부러진 발로 걸어가는 그곳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처럼―조온윤(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