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나는 …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여기 와 무슨 기도냐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김원각(1941∼2016)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꺼지라고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단 한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
고래의 길과 / 갯지렁이의 길과너구리의 길과 / 딱정벌레의 길과제비꽃의 길과 / 굴참나무의 길과북방개개비의 길이 있고드디어 인간의 길이 생겼다그리고 인간의 길옆에피투성이가 된 고양이가 버려져 있다북방개개비의 길과 / 굴참나무의 길과제비꽃의 길과 / 딱정벌레의 길과너구리의 길과 / 갯지…
군대 간 아들이 보고 싶다고자다 말고 우는 아내를 보며저런 게 엄마구나 짐작한다허리가 아프다며 침 맞고 온 날화장실에 주저앉아 아이 실내화를 빠는 저 여자봄날 벚꽃보다 어지럽던내 애인은 어디로 가고돌아선 등만 기억나는 엄마가 저기 ―전윤호(1964∼ )
소나기 멎자매미소리젖은 뜰을다시 적신다.비 오다 멎고, 매미소리그쳤다 다시 일고,또 한여름이렇게 지나가는가.소나기 소리매미소리에아직은 성한 귀기울이며또 한여름이렇게 지나보내는가. ―김종길(1926∼2017)
밤에 눈을 뜬다. / 그리고 호수에 / 내려앉는다.물고기들이 / 입을 열고 / 별을 주워 먹는다.너는 신기한 구슬 / 고기 배를 뚫고 나와 / 그 자리에 떠 있다.별을 먹은 고기들은 / 영광에 취하여 / 구름을 보고 있다.별이 뜨는 밤이면 / 밤마다 같은 자리에 / 내려앉는다.밤마다 …
그대 보이지 않는 것은없어진 것이 아니라수미산이 가려 있기 때문이리그대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없어진 것이 아니라잎새에 가려 있기 때문이리그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없어진 것이 아니라바람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리아 두고 온 얼굴을 찾아하늘로 솟구치는 몸부림그대 가슴에 뚫린 빈 항아…
(상략)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그러면 전 세계의 시민들이/각자의 생일날 밤에/멋대로 축포를 쏜다 한들/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포구가 꽃의 중심을 겨누거나/술잔의 손잡이를 향하거나/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별을 포탄삼아 쏘아댄다면/세계는 밤에도 빛날 테고/사람들은 모…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1903∼1988)시는 읽는 …
어느 날 아침 게으른 세수를 하고 대야의 물을 버리기 위해 담장가로 갔더니 때마침 풀섶에 앉았던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담장 높이만큼이나 폴짝 뛰어오르더니 거기 담쟁이넝쿨에 살푼 앉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미끄러지듯 잎 뒤에 바짝 엎드려 숨을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그놈 참 신기…
벚꽃 지는 걸 보니푸른 솔이 좋아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벚꽃마저 좋아―김지하(1941∼2022)
해질 무렵,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가떨어진 단추 하나를 보았지.그래, 그래, 우리는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이렇게 단추 하나 떨어뜨리지.그래, 그래, 우리는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쪽 하늘에 깜빡, 해를 하나 떨어뜨리지.―이준관(1948∼)
내 쓸쓸한 날 분홍강 가에 나가울었지요, 내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 가에고기떼 햇빛 속에 모일 때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당신은 따뜻했지요.한때 우리는 함께 이곳에 있었고분홍강 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있을 때나웃음은…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저 소리 뒤편에는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저 모습 뒤편에는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