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열차 맨 뒤 칸에 서서지나온 시절의 영사기를 돌리면쏘아 올린 포탄에아이들의 신발이 멀리 날아가고산불에 집을 잃은 새들의완전한 멸종을 슬퍼하는 이들이저마다 작은 행진을 벌이고 있어요이제는 작은 것을 말하고 싶어요(하략)―주민현(1989∼ )
탁자 위맑은 유리컵에 담긴물이 자꾸 먹고 싶어입을 벌리다가나는 내 육신이 불쌍해졌다주인을 잘못 만나이 무슨 고생인가나는 내 육신에게 진정 사과했다미안하다미안하다미안하다―정채봉(1946∼2001)
문학평론가‘사랑’을 낭만의 범주에 놓던 날이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나를 사랑해서 사랑을 찾던 때. 조금은 어렸을 때. 아직 사랑에 베이지 않았을 때. 그때는 사랑 옆에 열정이나 설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랑도 사랑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커가면서 배웠다. 특히…
‘남천’은 나무 이름이다. 햇볕에 강하고 추위도 잘 견딘다는, 실내에도 어울리고 울타리에 심어도 좋다는 남천나무 말이다. 그런데 그 나무를 못 봤어도 괜찮다. 우리 안에서 남천은 수만 개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은 남천 대신 다정한 눈동자를 떠올…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1한 여인이 운다네다 큰 한 여인이 운다네이곳은 물소리가 담을 넘는 오래된 동네나 태어나 여직 한번도 옮긴 적 없다네그런 동네에 여인의 울음소리 들리네처음엔 크게 그러다 조금씩 낮게산비알 골목길을 휘돌아 나가네햇빛도 맑은 날 오늘은 동네가 유난히 조용하네한 우물 깊어지네(하략) ―최…
화장실에 꽃을 두고 왔다모래사장에 짐을 내려놓고서야 생각났다매리골드는 처음이잖아이러니까 그리운 게 나쁜 감정 같네누굴 주려던 건 아니지만두고 온 꽃을 가지러 갈까?이미 늦은 일이야그냥 평생 그리워하자꽃을 두고 왔어내가 말했을 때우리 중 평론가만이 그걸 가지러 갔다(중략)이제 그만 돌아…
선생님 제 영혼은 나무예요제 꿈은 언젠가 나무가 되는 것이에요아이가 퉁퉁 부은 얼굴로주저앉아 있다가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간다영혼이란 말은 언제부터 있어서너는 나무의 영혼이 되어버렸나영혼은 그림자보다 흐리고영혼은 생활이 없고영혼은 떠도는 것에 지쳤다영혼은 다정한 말이 듣고 싶다영혼은 무…
한나절은 숲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조오현(1932∼2018)‘내 울음소리’는 현대 시조이다. ‘시조’라는 말을 듣고 나면 조금 더 보인다. ‘한나절은 숲속에서’,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
(…)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크게 다르랴,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옹다옹 싸우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매화꽃 피고 지기 어언 십년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 그…
(전략)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하품을 …
새소리는 어디서 왔을까 새도 숲도 없는 이곳에 새소리가 들려왔다면 내 안에서 네 안에서 그도 아니면 신이 있다면 새소리로 왔을까 늪 같은 잠 속에서 사람들을 건져내고 아침이면 문가로 달아나는 반복되는 장난 은빛 깃털만이 신의 화답으로 놓인다면 그도 신이라 부를까 내가 새소리를 듣는…
낯선 사람들끼리 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집 부담없이 혼자서 끼니를 때우는 목로 밥집이 있다 혼자 먹는 밥이 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 막막한 벽과 겸상하러 찾아드는 곳 밥을 기다리며 누군가 곡진하게 써내려갔을 메모 하나를 읽는다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그렇구나, 혼자 …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
응, 듣고 있어 그녀가 그 사람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라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입술을 조금씩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그 사람은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다시 그 이야기를 했고 한참이나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또다시 그 이야기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