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마세요/꽃말을 만든 첫 마음을 생각한다/꽃 속에 말을 넣어 건네는 마음/꽃말은 못 보고 꽃만 보는 마음도 생각한다/나를 잊지 마세요/아예 꽃을 못 보는 마음/마음 안에 꽃이 살지 않아/꽃을 못 보는 그 마음도 생각한다/나를 잊지 마세요/꽃말을 처음 만든 마음을 생각한다/꽃을…
따뜻한 눈빛만 기억해야 하는데/경멸스런 눈빛만 오래도록 남았네/얼크러진 세월이 지나가고 근거 없는 절망/우울한 거짓말이 쌓이고 나는 그 말을 믿네 가난하고 고독한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네/진짜 슬픈 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용기도 헌신도 잃어버렸다는 것/잊힌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성화를 부렸다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엄마는 내게 말했다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톱을 내려놓고 …
익룡의 깃털이 비대칭이어서 하늘을 날 수 있었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날지는 않았겠지 / 가끔은 적에게 쫓겨 죽은 척도 하고 / 잠시 잠깐 죽는 연습도 하며 / 이 무거운 별에서 이륙하기 위해 죽어라 달리다가 / 덜커덕 죽기도 했겠지 / 한 마리의 익룡이 하늘을 날기까지 겪었던 무수한 …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한밤중 나를 깨워/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등목을 청하던 어머니,/물을 한바가지 끼얹을 때마다/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까맣게 탄 등에/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어머니의 등…
카페에서 나오니/끓는 도시였다긴 햇살 타오르던 능소화는/반쯤 목이 잘렸다/어디서 이글거리는 삼복염천을 넘을까보름달/요제프 보이스의 레몬빛이다내 안의 늘어진 필라멘트 일으켜/저 달에 소켓을 꽂으면/파르르 환한 피가 흐르겠지/배터리 교체할 일 없겠지달님이 이르시기를/차갑게 저장된 빛줄기들…
이 작고 주름진 것을 뭐라 부를까?가스 불에 올려놓은 국이 흘러넘쳐 엄마를 만들었다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들의 목소리를 만져보려고 손끝이 예민해진다잠든 밤의 얼굴을 눌러본다볼은 상처 밑에 부드럽게 존재하고문은 바깥을 향해 길어진다엄마가 흐릿해지고 있다자꾸만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름표를 …
자고나면/이마에 주름살,/자고나면/뜨락에 흰 라일락./오지랖이 환해/다들 넓은 오지랖/어쩌자고 환한가./눈이 부셔/눈을 못 뜨겠네./구석진 나무그늘 밑/꾸물거리는 작은 벌레./이날 이적지/빛을 등진 채/빌붙고 살아 부끄럽네./자고나면/몰라볼 이승,/자고나면/휘드린 흰 라일락.―김상옥(…
벽시계를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여기 어디쯤이란 듯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못 자리는 주사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벽은 한동안환상통을 앓는다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박현수(1966∼ )
이따금 몸을 반 이상 물 밖으로 솟구친다/새끼를 낳으러/육천오백 킬로를 헤엄쳐온 어미 고래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그것도 더 크면…
너 두고/돌아가는 저녁/마음이 백짓장 같다./신호등 기다리다/길 위에/그냥 흰 종이 띠로/드러눕는다. ―고두현(1963∼ )
(생략)유월에 내리는 함박눈 같은 거잊지 말자니, 모두 잊히고꾹 참고 맞던 아이의 불주사처럼지워진 그림자 닻 내리고처량하게 무심하게식어가는 심장을 살아내는 일내 웃음과 당신 눈물에 무관심하던계절 접을 때 호접몽, 꿈은닫혔다 열리는 지상낙원이므로깜빡 취해 웃었다 운다 해도모두가 희디흰 …
이제는 독해져야겠다나뭇잎이 시퍼런 입술로 말했다이제는 독해져야겠다나뭇잎이 시퍼런 입술로 말했다내 친구들이 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성공한 내 친구들이 독해지고성공하려는 내 친구들도 독해지고실패한 친구들도 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달라진다는 것은 외로워진다는 것독해지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나…
누가 흘렸을까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 난 보따리에서빠져 떨어졌을까역전 광장아스팔트 위에밟히며 뒹구는파아란 콩알 하나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 들어도회지 밖으로 나가강 건너 밭 이랑에깊숙이 깊숙이 심어 주었다그때 사방 팔방에서저녁 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인이라는 말은내 성명 위에 늘 붙는 관사.이 낡은 모자를 쓰고나는비오는 거리로 헤매였다.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너무나 어줍잖은 것또한 나만 쳐다보는어린 것들을 덮기에도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것. 허나, 인간이평생 마른옷만 입을가부냐.다만 모발이 젖지 않는그것만으로나는 고맙고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