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근심―한용운(1879∼1944)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구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
강우―김춘수(1922∼2004)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엄마 걱정 ―기형도(1960∼1989)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
삶 ―한하운(1920∼1975) 지나가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 오르것다. ―이…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 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이용악(1914∼1971) 이용악을 인생파 시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민족문학 시인으로 보는 …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
봄꽃이 핀다. 팡팡 소리를 내는 것처럼 경쾌하게 꽃이 핀다. 날이 흐려도, 비가 내려도 꽃봉오리는 부지런히 때를 찾아 핀다. 반자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잔뜩 일어나는 세상인 줄만 알았더니, 아직도 자연은 제 할 일을 해주고 있다니. 이런 섭리를 느끼는 순간에는 감사함이 깃든다. 겨…
독작(獨酌) ―임강빈(1930∼2016) 주량이 얼마냐고 물으면 좀 한다고 겸손을 떨었다 세상 한구석에서 대개는 외로워서 마셨다 몇 안 되는 친구가 떠났다 그 자리가 허전하다 거나하게 정색을 하며 마신다 독작 맛이 제일이라 한다 외롭지 않기 위해 혼자 마신다 과거는 배반을 …
홀로 걸어가는 사람 ―최동호(1948∼ )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조금 비껴가는 화살처럼 마음 한가운데를 맞추지 못하고 변두리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먼 곳을 향해 여린 씨를 날리는 작은 풀꽃의 바람 같은 마음이여 자갈이 날면 백 리를 간다지만 모래가 날리면 만 리를 간다고 …
산·2 ―한성기(1923∼1984) 산을 오르다가 내가 깨달은 것은 산이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말 많은 세상에 부처님도 말이 없고 절간을 드나드는 사람도 말이 적고 산을 내려오다가 내가 깨달은 것은 이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이 없는 세상에 사람보다는 부처님이 더 말…
엄마 목소리 ―신현림(1961∼) 물안개처럼 애틋한 기억이 소용돌이치네 한강다리에서 흐르는 물살을 볼 때처럼 막막한 실업자로 살 때 살기 어렵던 자매들도 나를 위한 기도글과 함께 일이만 원이라도 손에 쥐여주던 때 일이십만 원까지 생활비를 보태준 엄마의 기억이 놋그릇처럼 우네 내주신 …
봄 ― 최계락(1930∼1970) 양지바른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아가는야 나즉히 불러보는 것 “봄이야 오렴” “봄이야 오렴” 어디라 바라보는 산마다 들판마다 흰 눈만 차거히 다가서는데 “봄은 언제사 오나” “봄은 언제사 오나” 스치는 바람결에 손만 시리며 아가는야 그래도 기다리는…
옛이야기 구절 ―정지용(1902∼1950)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 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팠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팠노라.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빡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
섣달 그믐밤에 ―강소천(1915∼1963) 내 열 살이 마지막 가는 섣달 그믐밤. 올해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남은 이야기를 마저 적는다. -아아, 실수투성이 부끄러운 내 열 살아, 부디 안녕, 안녕… 인제 날이 새면 새해, 나는 열하고 새로 한 살. 내 책상 위엔 벌써부터 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