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 가람 이병기(1891∼1968) 눈 눈 싸락눈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눈 연일 그 추위에 몹시 볶이던 보리 그 참한 포근한 속의 문득 숨을 눅여 강보에 싸인 어린애마냥 고이고이 자라노니 눈 눈 눈이 아니라 보리가 쏟아진다고 나는 홀로 춤을 추오 예전의 어린이들은 추워서 …
엄마 ―나기철 (1953∼ ) 아내가 집에 있다 아파트 문 열기 전 걸음이 빨라진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있는 집에 올 때처럼 어린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는 장면은 언제나 같다. 문을 열면서 집에 있는 가장 좋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온다. 대개는 ‘엄마’라고 부르고, 상황에 따…
나무 아래 시인 ―최명길(1940-2014) 광야에 선 나무 한 그루 그 아래 앉은 사람 그는 시인이다. 나무는 광야의 농부 그 사람은 광야의 시인 가지 뻗어 하늘의 소리를 받들고 뿌리 내려 땅의 소리를 알아채는 나무 그런 나무 아래서 우주를 듣는 그런 사람 그 또한 시인이다. …
백설부 ―김동명(1900∼1968) 눈이 나린다 눈이 날린다 눈이 쌓인다 눈 속에 태고가 있다 눈 속에 오막살이가 있다 눈 속에 내 어린 시절이 있다 눈을 맞으며 길을 걷고 싶다 눈을 맞으며 날이 저물고 싶다 눈을 털며 주막에 들고 싶다 눈같이 흰 마음을 생각한다 눈같이 찬 님…
평안을 위하여 ―김남조(1927∼)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 있는 겨울 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고고(孤高) ― 김종길(1926∼2017)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밤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깵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
그대 ―정두리(1947∼ ) 우리는 누구입니까. 빈 언덕의 자운영꽃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 이름을 얻지 못한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 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다가오는 첫눈입니다 (…) 우리는 어떤 노래입니까. 이노리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 아름…
아비 ―오봉옥(1961∼ ) 연탄장수 울 아비 국화빵 한 무더기 가슴에 품고 행여 식을까봐 월산동 까치고개 숨차게 넘었나니 어린 자식 생각나 걷고 뛰고 넘었나니 오늘은 내가 삼십 년 전 울 아비 되어 햄버거 하나 달랑 들고도 마음부터 급하구나 허이 그 녀석 잠이 안 들었는지. 우리…
십계(十戒) ― 박두진(1916∼1998) 거기서 너 서 있는 채로 떠내려가지 말아라. 거기서 너 서 있는 채로 무너지지 말아라. 거기서 너 서 있는 채로 뒤돌아보지 말아라. 거기서 너 서 있는 채로 눈물 흘리지 말아라. 거기서 너 서 있는 채로 너를 잃어버리지 말아라. 네가 가진 …
노신(魯迅) ―김광균(1914∼1993)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
바람 부는 날 ― 박성룡(1934∼2002) 오늘 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
호박 ― 이승희(1965∼ ) 엎드려 있었다지, 온 생애를 그렇게 단풍 차린 잎들이 떨어지며 는실난실 휘감겨와도 그 잎들 밤새 뒤척이며 속삭였건만 마른풀들 서로 몸 비비며 바람 속으로 함께 가자 하여도 제 그림자만 꾹 움켜잡고 엎드려만 있었다지. 설움도 외로움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
벼랑 끝 ― 조정권(1949∼2017)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 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한밤중을 느꼈습니다.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
봉숭아꽃 ―민영(1934∼ ) 내 나이 오십이 되기까지 어머니는 내 새끼손가락에 봉숭아를 들여주셨다. 꽃보다 붉은 그 노을이 아들 몸에 지필지도 모르는 사악한 것을 물리쳐준다고 봉숭아물을 들여주셨다. 봉숭아야 봉숭아야, 장마 그치고 울타리 밑에 초롱불 밝힌 봉숭아야! 무덤에 누…
차부에서 ― 이시영(1949∼ )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 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 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 었다. 아버지였다. 예전에는 많은 관계가 지금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