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목 살이 ― 홍사성(1951∼ ) 퇴직하면 산속 작은 암자에서 군불이나 지 피는 부목 살이가 꿈이었다 마당에 풀 뽑고 법당 거미줄도 걷어내며 구름처럼 한가하 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요즘 나는 신사동 어디쯤에서 돼지꼬리에 매달린 파리 쫓는 일 하며 산다 청소하고 손님…
으름넝쿨꽃 ―구재기(1950∼ ) 이월 스무 아흐렛날 면사무소 호적계에 들러서 꾀죄죄 때가 묻은 호적을 살펴보면 일곱 살 때 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붉은 줄이 있지 돌 안에 백일해로 죽은 두 형들의 붉은 줄이 있지 다섯 누이들이 시집가서 남긴 붉은 줄이 있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
달아 ― 김후란(1934∼ ) 달아 후미진 골짜기에 긴 팔을 내려 잠든 새 깃털 만져주는 달아 이리 빈 가슴 잠 못 드는 밤 희디흰 손길 뻗어 내 등 쓸어주오 떨어져 누운 낙엽 달래주는 부드러운 달빛으로 이번 추석에는 무슨 소원을 빌까. 달 중에 제일은 보름달, 보름달 중에 제일은…
모데미풀 ― 문효치(1943∼ ) 하늘이 외로운 날엔 풀도 눈을 뜬다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는 하늘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아도 하늘은 눈물을 그치며 웃음 짓는다 외로움보다 독한 병은 없어도 외로움보다 다스리기 쉬운 병도 없다 사랑의 눈으로 보고 있는 풀은 풀…
강물이 될 때까지 ―신대철(1945∼ )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
간찰(簡札) ― 이근배(1940∼ ) 먹 냄새 마르지 않는 간찰 한쪽 쓰고 싶다 자획이 틀어지고 글귀마저 어둑해도 속뜻은 뿌리로 뻗어 물소리에 귀를 여는. 책갈피에 좀 먹히다 어느 밝은 눈에 띄어 허튼 붓장난이라 콧바람을 쐴지라도 목숨의 불티같은 것 한자라도 적고 싶다. …
풍경 ― 김제현(1939∼ )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한…
풍장 27 ― 황동규(1938∼ )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
와온의 저녁 ― 유재영(1948∼) 어린 물살들이 먼 바다에 나가 해종일숭어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불빛들은 모두 앞다퉈 몰려나와 물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와온, 이라고 했다. 단어에서 풍기는 결이 곱다. 여기 등장하는 ‘와온’은 한 지역의 이름이다. ‘동쪽으로는 …
긴 편지 ―홍성란(1958∼ ) 마음에 달린 병(病) 착한 몸이 대신 앓아 뒤척이는 새벽 나는 많이 괴로웠구나 마흔셋 알아내지 못한 내 기호는 무엇일까 생의 칠할은 험한 데 택하여 에돌아가는 몸 눈물이 따라가며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마음은 긴 편지를 쓰고 전하지 못한다 …
지구의 눈물 ― 배한봉(1962∼) 눈물이 많다, 눈물왕국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칼로 수박을 쪼개다 수박의 눈물을 만난다 (…) 그렇기 때문인가? 사람들은 둥근 것만 보면 깎거나 쪼개고 싶어 한다 지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숲을 깎고 땅을 쪼개 날마다 눈물을 뽑아 먹는다 번성하는 문…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1954∼ )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 미쟁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
꽃씨로 찍는 쉼표 ― 이은규(1978∼ ) 먼 이야기 어느 왕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 왕은 그들에게 꽃씨를 나눠주며 가장 잘 간직한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했지 간직이라는 말에 방점을 첫째 아들은 바람 한 줄기 없는 금고 속에 꼭꼭 숨겨두었고 둘째 아들은 꽃씨를 팔아 더 귀…
은현리 천문학교 ― 정일근(1958∼ ) 내 사는 은현리 산골에 별을 보러 가는 천문학교가 있다. 은 현리 천문학교에서 나는 별반 담 임선생님. 가난한 우리 반 교실 에는 천체만원경이나 천리경은 없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부터 칠판을 깨끗이 닦아놓는 착한 하 늘이 있고, 일찍 등교…
달이 빈방으로 ― 최하림(1939∼2010) 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