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빈방으로 ― 최하림(1939∼2010) 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
큰아이에게 ―엄마, 엄니, 어머니로부터 ― 이은봉(1953∼ ) 상추쌈, 씻다가 너를 생각한다 된장국, 끓이다가 너를 생각한다 콩나물, 무치다가 너를 생각한다 땡볕, 살 따갑고 매미소리, 귀 따갑고 땅훈기, 숨막히고 ……… 아이야, 서울의 큰아이야 엄…
네가 올 때까지 ― 이건청(1942∼) 밤 깊고 안개 짙은 날엔 내가 등대가 되마 넘어져 피 나면 안 되지 안개 속에 키 세우고 암초 위에 서마 네가 올 때까지 밤새 무적을 울리는 등대가 되마 이 시는 지하철 역사, 투명한 유리창 위에 적혀 있다. 그 전에는 한 성실한 시인의…
천수답 ― 이성선(1941∼2001) 도시의 길들은 바둑판 줄처럼 구획져 뻗고 인간들 마음도 그 길 따라 굳어지고 마침내 이 땅 들의 논들도 모두 가로세로 반듯하게 정리 되어 바람조차 조심히 비켜 간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산골 하늘물만 받아서 벼를 기르는 천수답 밤에는 …
풍·1 ― 이윤택(1952∼ ) 아이들이 봄소풍을 간다 잘난 권세도 학문도 닿지 않는 곳으로 민들레 풀씨처럼 움직이는 세계의 느낌처럼 철 지난 역사를 뒤켠으로 밀어내면서 우리는 민들레 풀씨를 불어본 때를 기억할까. 기억 속의 우리는 아마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풀씨가 흩어지는 모양…
완생― 윤효(1956∼ ) 그렇게 좋아하시던 홍시를 떠 넣어 드려도 게간장을 떠 넣어 드려도 가만히 고개 가로저으실 뿐, 그렇게 며칠, 또 며칠, 어린아이 네댓이면 들 수 있을 만큼 비우고 비워 내시더니 구십 생애를 비로소 내려놓으셨다. ―완생(完生).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안부 ― 김초혜(1943∼) 강을 사이에 두고 꽃잎을 띄우네 잘 있으면 된다고 잘 있다고 이때가 꽃이 필 때라고 오늘도 봄은 가고 있다고 무엇이리 말하지 않은 그 말한 나무가 있다. 나무 곁으로는 수없이, 정말이지 수없이 많은 무엇이 지나갔다. 어떤 것은 길게 머물렀고,…
파랗게, 땅 전체를 ― 정현종(1939∼) 1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 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봄 풀잎 2 그림 속의 여자도 개구리도 꿈틀거리는 봄바람 속 내 노래의 물소리는 저 풀잎들 가까이 흘러가야지 시인은 풀잎을 어떻게 노래할까. 그는 풀잎이…
반성·100 ― 김영승(1959∼ )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 장이지? 금방이겠다, 뭐.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1921∼1984)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
보내 놓고 ― 황금찬(1918∼2017) 봄비 속에 너를 보낸다 쑥순도 파라니 비에 젖고 목매기 송아지가 울며 오는데 멀리 돌아간 산굽잇길 못 올 길처럼 슬픔이 일고 산비 구름 속에 조는 밤 길처럼 애달픈 꿈이 있었다. 황금찬 시인은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시를 썼던, …
그리운 것들은 모두 먼데서 ― 이성부(1942∼2012) 오늘은 기다리는 것들 모두 황사가 되어 우리 야윈 하늘 노랗게 물들이고 더 길어진 내 모가지, 깊이 패인 가슴을 씨름꾼 두 다리로 와서 쓰러뜨리네. 그리운 것들은 바다 건너 모두 먼데서 알몸으로 나부끼다가 다 찢어져 뭉개진…
봄― 이윤학(1965∼ ) 흰나비가 바위에 앉는다 천천히 날개를 얹는다 누가 바위 속에 있는가 다시 만날 수 없는 누군가 바위 속에 있는가 바위에 붙어 바위의 무늬가 되려 하는가 그의 몸에 붙어 문신이 되려 하는가 그의 감옥에 날개를 바치려 하는가 흰나비가 움직이지 않는다 …
제비꽃에 대하여― 안도현(1961∼ )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꽃― 김사인(1955∼ )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고단한 3월이 지나가고 있다. 얼었던 땅이 풀리느라 땅도 몸살을 하고, 차갑던 하늘에는 따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