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김선우(1970∼ )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
우음(偶吟) 2장― 구상(1919∼2004) 1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2 앉은 자…
장미와 가시 ― 김승희(1952∼)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
별이 사라진다 ―천양희(1942∼ ) 나는 1분에 16번 숨쉬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내 심장은 하루에 10만번씩 뛰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죽을 때 빠져나가는 내 무게는 21그램인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나는 1분에 0.5리터 공기를 마시는데 별은 1…
혼자 먹는 밥 ― 송수권(1940∼2016)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
편지 ― 윤동주(1917∼1945)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부치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도깨비’에는 ‘시’가 가득했다. 한…
눈 내리는 벌판에서 ― 도종환(1954∼ )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발자국 소리만이 외로운 길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몸보다 더 지치는 마음을 누이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지고 싶다 둘러보아도 오직 벌판 등을 기대어 더욱…
의식(儀式)·3 ― 전봉건(1928∼1988) 나는 너의 말이고 싶다. 쌀이라고 하는 말. 연탄이라고 하는 말. 그리고 별이라고 하는 말. 물이 흐른다고 봄은 겨울 다음에 오는 것이고 아이들은 노래와 같다라고 하는 너의 말. 또 그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불꽃의 바다가 되는 시이…
적막한 세상 ― 권선옥(1951∼ ) 모처럼 서울 갔다 돌아오는 길, 다리 아프게 돌아다니면서 집 구경만 하고 결국 그냥 돌아왔다 이십 년 넘게 아내를 직장생활을 시키고서도 번듯한 서울집 한 채 살 수 없는 나의 형편, 잠이 든 아들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능한 아비의 자식이 가엾…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1945∼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
송년(送年) ― 김규동(1925∼2011)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
밤눈 ―김광규(1941∼ )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처음부터 시는 춥고 난감한 상황에서 …
아버지 자랑 ― 임길택(1952∼1997)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 자랑이 무엇일까 하고 오늘에야 생각해보면서 그러나 탄 캐는 일이 자랑 같아 보이지는 않고 누가 먼저 나서나 몰래 친구들 눈치만 살폈다 그때 영호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술…
첫눈 ―박성우(1971∼ )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1950∼ )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으나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