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라치다 ― 함민복(1962∼ )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도시에 살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사람들인 것만 같다. 물론 살아 있고 움직이는 존재 중에는 반려…
개여울 ― 김소월(1902∼1934)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혹 ― 손기섭(1928∼ ) 언제부턴가 내 등에 점점 커가는 콩알만 한 혹 하나가 생겼는데 손이 닿지 않아 만질 수도 없고 거울로 비쳐봐도 잘 보이지도 않고 가끔 가려운 듯하면서 신경을 긁는다 손수 칼 잡을 때 같으면 친구 이리 와 그까짓 것 문제없어 하고 손쉽게 떼어내 줄 것 같…
정든 병 ― 허수경(1964∼ )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
아내 ― 김광섭(1905∼1977) 손이 제일 더럽다면서 씻고 들어가 방 한 구석을 지키며 한 집을 세워 나가던 사람 늦이삭이지만 막 주우려는데 인술의 칼끝에 숨통이 찔렸던가 눈 뜨고 마지막 한 마디 없이 가니 보이는 데마다 비고 눈물이 고여 이 봄 다하도록 꽃 한 송이 못 봤네. …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 김선우(1970∼ )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달고달아낮…
봄날 ― 윤제림(1960∼ ) 소리 없이 쏟아지는 저 햇살 그대로 법일 수 있다면 좋겠네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도 눈물 터지게 하는 얼음장 풀리는 소리만으로 응어리 풀리게 하는 아내의 야윈 뺨에도 화색이 돌게 하는 딸애의 흰 낯에도 푸르름이 비치게 하는 기척도 없이 다가드는 저 환한 …
선물 받은 날― 유안진(1941∼ ) 춘삼월 초아흐레 볕 밝은 대낮에 홀연히 내게 한 천사를 보내셨다 청 드린 적 없음에도 하늘은 곱고 앙징스런 아기천사 하나를 탐낸 적 없음에도 거저 선물로 주시며 이제 너는 어머니라 세상에서 제일로 복된 이름도 …
길 ―김기림(1908∼?)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 )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
속구룡사시편 ―오세영(1942∼ ) 한 철을 치악에서 보냈더니라. 눈 덮인 멧부리를 치어다보며 그리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빈 가지에 홀로 앉아 하늘 문 엿보는 산 까치같이, 한 철을 구룡에서 보냈더니라. 대웅전 추녀 끝을 치어다보며 미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 흰 …
나무가 나에게 ― 이해인(1945∼ )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치지 않고 슬퍼도 슬프다고 눈물 흘리지 않고 그렇게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견디는 그만큼 내가 서 있는 세월이 행복했습니다 내가 힘들면 힘들수록 사람들은 나더러 더 멋지다고 더 아름답다고 말해주네요 하늘을 잘 보려고 땅 …
30년 전-1959년 겨울 ―서정춘(1941∼ )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다면, 누구든 이 시를 만날 수 있다. 서정춘 시인의 이 작품은 그곳 스…
별 헤는 밤 ― 윤동주(1917∼1945)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
목숨 ―유치환(1908∼1967) 하나 모래알에 삼천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星芒)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 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 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 데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飄飄)한 이 즐거움이여 시를 들고 찾아…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1942∼ )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